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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가마·장작불의 예술 우리 도자기 문화는 인류유산 자격 충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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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호 08면

파리에 있는 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유네스코) 본부는 자국 문화의 우수성을 알리려는 195개국 ‘문화 대사’들이 은근 기싸움을 벌이는 곳이다. 1985년 본부 건물을 증축하면서 각국의 최고 예술가들을 초청, 저마다의 문화를 직접 선보이고 또 접할 수 있도록 해놓았다. 이곳에 있는 호안 미로 전시장 전관에서 3월 31일부터 4월 4일까지 도자기 전시가 열린다. 주인공은 한국 작가 신경균(50). 도자기 종주국을 자처하는 한·중·일 3국의 도자기 작가로는 처음으로 전시를 승인받았다.

파리 유네스코 본부 개인전 앞둔 도예가 신경균

그는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국보가 된 이도다완(井戶茶碗)을 재현해 명성을 떨친 도자기 장인 장여(長如) 신정희(1930~2007) 선생의 3남이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아버지 밑에서 발물레를 찼다. 부산시립공예고(현 부산디자인고), 부산산업대(현 경성대)에서 도자기를 공부하며 석사까지 마쳤다. 지금은 장안요(長安窯)에서 소나무 장작으로 불을 지피는 전통 흙가마 방식으로 도자기를 만들고 있다. 그의 작품은 2005년 부산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 소개되며 각국 지도자들에게 한국 도자기의 자연스러운 멋을 각인시켰다.

그는 왜 전통 방식을 고수하는 것일까. 파리에서 각국 문화 사절단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유네스코 전시를 앞두고 마지막으로 가마에 불이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2월의 마지막 날 남녘행 KTX에 몸을 실었다.

부산시 기장군 장안읍 장안리는 그의 가마와 작업실, 살림집과 전시관이 모여 있는 삶의 터전이다. 1991년 석사 논문을 쓰기 위해 처음 가마를 만든 곳인데, 알고 보니 이 일대가 조선시대 이전부터 이름난 도요지였다고 했다.

가마에 첫 불을 들이는 놀이칸 양 옆으로 엄청난 양의 장작이 쌓여 있었다. 3~4년간 말린 육송이다. 두툼한 소나무 껍질을 일일이 벗겨서 통나무 장작의 겉은 맨질맨질할 정도다. 이것을 하나하나 도끼질해 어린애 팔뚝만한 굵기로 잘라놓았다. 정성의 시작이다. “장작은 소나무만 씁니다. 다 타도 재가 나오질 않거든요. 요즘은 소나무 재선충 때문에 구하기에 애먹습니다. 전남 고흥에도 가마가 있는데 그곳에서 소나무를 가져오지요.”

누런 바가지 서너 개를 잇달아 엎어놓은 듯 둥글둥글한 ‘망생이 가마’는 약간 경사가 져 있다. 놀이칸을 시작으로 위쪽으로 2번 칸, 3번 칸, 4번 칸, 그리고 마지막인 끌목칸이다. 각 칸에는 사람 하나가 가까스로 들어갈 만한 구멍이 있는데, 내화벽돌과 흙 반죽으로 막혀 있다. 아버지 일을 거들고 있는 큰아들 현민(21·경성대 공예과 도예전공)이 3번 칸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열어봐라” 소리에 벽돌을 걷어내고 가마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아들인지 딸인지 문 열기 전에는 몰라요.”

그 소리가 끝나기 무섭게 작고 시커먼 구멍에서 허연 달 항아리 하나가 ‘쑴풍’하고 튀어나왔다. 정말 아기가 나오는 것 같았다. 신 작가가 새 목장갑으로 이리저리 닦으며 흠이 없는지 매의 눈으로 살핀다. 키가 45.5cm. 뜨끈뜨끈하고 보드라운 것이 꼭 아기 엉덩이를 만지는 느낌이다.

가마 안을 들여다봤다. 찻잔부터 사발, 달항아리가 차곡차곡 쌓여 있다. “이게 다 자리가 있어요. 한 자리 차지한다는 말도 여기서 나왔죠. 뭐든지 자기 자리에 있어야 해요.”

꺼내는 와중에 하나가 딱 걸렸다. “색이 맑아야 하는데 탁하다. 망치 가져온나.” 순식간에 달 항아리 하나가 박살이 났다. “순백자 굽기가 참 힘들어요. 10개 구워 1개 건지는 정도? 깨는데 얼마나 가슴이 아픈지 몰라요. 그래서 실학자들은 ‘가마 구조를 중국처럼 바꾸자’고 했어요. 중국은 올챙이 가마라 부르는 단가마인데 균일하게 나오는 편이거든요. 그럼 왜 안 바꿨느냐? 우리는 버리는 건 많지만 잘 나온 것은 기가 막히거든. 그러니 임금님 입장에서는 바꿀 이유가 없었죠.”

가스 가마가 ‘불의 예술’을 어느 정도 통제하게 된 오늘날, 여전히 전통식 장작 가마를 고집하는 이유는 뭘까. 그는 “과정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도자기를 직접 만드는 과정은 30%입니다. 흙 반죽하고, 잿물 바르고, 나무를 패고 때고 하는 과정이 70%죠. 이게 사람이 노력하는 부분인데 이건 전체 완성 과정에서 10%도 안 됩니다. 불이 90%를 결정하죠. 최선을 다해도 안 될 때가 있어요. 그래서 매력적일 수도 있고. 그저 정성을 다할 뿐이죠. 그런데 이 과정이 힘들고 불편하다고 바꾸면 이제 복원이 안 됩니다. 누군가 해야 되는 일을 제가 할 뿐이죠.”

그렇게 지난한 과정을 마치면 혼자 훌쩍 여행을 떠난다. 그것도 네팔이나 부탄 같은 오지로만 간다. 텅 빈 것을 찾으러, 가서 다 비우기 위해서다. 스리랑카 출신의 담마라타나 대승정을 만난 것도 바로 그 오지 여행길에서였다.

한·중·일 작가론 첫 전시 … 전시비용 6억원 넘어
“정말 우연이었죠. 호수를 건너는데 같은 배를 타게 됐어요.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전통 방식으로 도자기를 굽는다고 하니 굉장히 관심을 보이더라고요. 알고 보니 유네스코에 큰 영향력이 있는 분이셨어요. 곧이어 전문가들이 제 가마터를 방문해 일주일간 있으면서 석사 논문까지 구해 검증을 마친 뒤 비로소 허가가 났죠. 지난해 5월 확정됐지만 알리는 것은 12월 넘어서 하라고 하더라고요. 훼방이 있을 수 있다면서.”

그는 무엇보다 한·중·일 3국 중 처음으로 도자기 전시를 갖는다는 것에 대단한 자부심을 느낀다고 했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우리 도자기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알리겠다는 각오다. “독일의 유명한 도자기 회사 마이센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일본인 관광객이 ‘일본 도자기를 베낀 것 같다. 역시 일본 도자기가 좋다’고 하자 독일 전문가가 뭐라고 한 줄 아세요? ‘그거 다 조선에서 도공들 잡아다가 만들게 한 거잖아’ 하더라고요. 어찌나 속이 시원하던지.”

이번 전시를 위해 각종 달 항아리 40여 점을 비롯해 찻잔·사발·접시 등 식탁에서 쓰는 그릇들로 100여 점을 마련했다. 하지만 준비 과정은 만만치 않다. 작품을 고르고, 포장을 하고, 인쇄물을 확인하는 작업 등이 모두 보통 일이 아니다. 파손 우려 때문에 비행기로 수송해야 하는데 이 비용만 해도 엄청나다. 6억원이 넘게 들어가지만 기관 지원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부산시·기장군·고흥군·파리 한국문화원이 내놓은 도합 1억5000만원 정도가 전부다. 유네스코 본부에서 한국 문화를 소개하는 일을 사실상 개인이 부담하고 있는 셈이다. 그래도 그는 “제 개인의 영광을 넘어 우리의 전통 도자기 문화가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는 데 조금이라도 힘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다”고 담담하게 말한다.

신 작가는 이번 전시를 통해 전통에 접목한 현대를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옛것에 머물기만 해서는 발전이 없습니다. 시대에 맞는 기술과 스타일을 접목하지 않으면 전통은 박제에 불과합니다. 우선 옛날과 지금은 먹는 음식이 다르잖아요? 그럼 그릇도 거기에 맞게 바뀌어야죠. 도예가는 기능인이 돼서는 안 됩니다.”

부친 신정희 그늘 벗어나 ‘신경균의 백자 세계’ 일궈
2층으로 된 전시장은 독특했다. 겉은 평범한 콘크리트 건물인데 안은 한옥 느낌이 물씬 났다. 10년 말린 소나무로 바닥을 깔고 실내는 서까래와 한지의 느낌을 오롯이 살렸다. 백자·분청·철화 달 항아리가 곳곳에서 당당하게 앉아 있다. 부엌 한 켠에는 찻사발을 비롯해 찻잔·주전자·사발·옴파리·보시기·종지·대접·호리병 등 다양한 그릇이 쌓여있다. 관련 서적이 그득한 서재는 신 작가의 사랑방이었다. 절절 끓는 아랫목에 두툼한 방석을 깔고 반질반질한 단풍나무 원목 찻상 앞에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부인 임계화씨가 찻사발에 말차를 따랐다.

-우리 도자기가 뭐가 좋은 건가요?
“세종실록 지리지를 보면 324곳의 가마가 기록돼 있는데 이 중 300곳 이상을 돌아봤어요. 일본과 중국도 주요한 곳은 다 가봤어요. 임진왜란은 도자기 전쟁이라 불리는데 그들은 왜 조선 도자기를 좋아했을까? (찻사발을 들어보이며) 이게 정원(正圓)이 아니잖아요? 불이 이렇게 만든 겁니다. 자연스럽잖아요. ‘좀 찌그러지면 어때’ 정신이랄까. 자로 잰 듯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일본인 사고로는 절대 안 되는 것이죠. 일부러 찌그러뜨리면 더 이상해지는 것이고. 특히 차를 마시기 위해서는 사발에 뜨거운 물을 부어야 하는데 이 찻사발은 열전도가 낮기 때문에 손으로 들어도 안 뜨겁죠. 이런 것들이 우리는 너무 흔해서 가치를 모르는 거고, 일본은 환장하는 거고.”

-그런 문리를 터득하려면 얼마나 걸리나요.
“배움이라는 게 안개비에 옷 젖듯 되는 것 같아요. 알게 모르게 보고 배우고 어느새 자기가 하고 있어야죠. 도제 교육은 20년은 배워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안 되는구나, 실패를 배우는 것이죠. 가스 가마에서는 실험을 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요즘 20년 배우겠다는 사람이 누가 있나요. 그러니까 사람은 많아도 깊이가 없는 거죠. 만들어 놓고도 왜 좋은지, 왜 나쁜지 몰라요.”

-실패할 때도 있을 텐데.
“그릇이 하나도 안 나올 때가 있죠. 하지만 원인만 알면 괜찮아요. 어떻게든 원인을 찾아냅니다. 실수는 할 수 있어요. 하지만 똑같은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 됩니다.”

-15살 때부터 부친 밑에서 일을 배우다가 독립을 하셨죠.
“아버지의 손과 발로 살면서 도자기의 모든 기형을 배웠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와 똑같이 만들면 아버지 뼈 팔아 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마침 집안 형제들이 도자기를 배우겠다고 들어오고 저는 논문도 통과됐기에 자복(참선용 방석)과 도끼, 그리고 아버지의 정신만 품고 나왔습니다. 지금은 분청철화에서 백자철화로 넘어가며 저만의 세계를 만들고 있습니다.”

-도자기를 만들며 뭘 느끼나요?
“평화입니다. 뜨거운 맛을 보다가 그것이 사라졌을 때의 평온함. 도자기는 그 과정을 겪고 나온 산물입니다. 욕망은 다 녹아버리고 자유와 평화만 남아 있죠.”

-달 항아리에 관심들이 많습니다. 가장 큰 특징이라면?
“흙이 달라요. 하동 백토와 양구 백토를 섞어 씁니다. 양구 백토는 질이 좋지만 화도가 낮아 자꾸 주저앉아요. 대신 하동 백토는 화도가 높아 기둥 역할을 하죠. 가마 안에서 견디는 힘이 있어야 하니까. 보름달처럼 동그랗게 만들어내는 게 관건입니다.”

-일하면서 가장 힘든 점은 무엇입니까?
“도자기의 출처를 밝히는 일입니다. 가마터를 수없이 돌아보며 끝없이 생각합니다. 중국과 일본의 골동품도 사 모으며 연구하고 있어요. 요즘엔 청동기에 푹 빠져 있습니다. 이게 주나라 때 청동 향로거든요. 도자기의 원형이기 때문에 역사 공부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은?
“누군가 물어봤어요. 대한민국 시대의 도자기는 있는가? 항상 조선 백자 아니면 고려 청자인가? 전 대답을 아직 못했습니다.”

“맛있는 음식은 좋은 그릇에 … 그릇은 쓰는 사람이 완성하는 것”
동갑내기 부인 임계화씨는 대학 동아리(다향회)에서 만났다. 경성대 연극영화과와 프랑스 국립고등연기학교를 나와 국내에서 전임강사 자리까지 제안받았지만 다 포기하고 도예가의 아내로서만 집중하고 있다. 도자기를 만드는 것 외의 모든 일이 그의 몫이다.

그가 상을 차려놨다며 부엌으로 불렀다. 머위, 정구지(부추), 김치와 갓김치, 지난해 묵은지 등이 정갈한 그릇 위에 얹혀 있었다. 모두 임씨가 집 근처 텃밭에서 가꾼 것들이다.
“뿌리 끝이 빨간 이 정구지는 사위한테도 안 주는 거랍니다. 도다리 쑥국도 많이 드세요. 맛있는 음식은 좋은 그릇에 담아야죠. 그릇은 쓰는 사람이 완성하는 것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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