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득의 패러디 파라다이스] 그런데 미안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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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호 30면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고등학교 첫 수업 시간에 선생님은 칠판에 문장 하나를 썼다. “이 문장이 어디 나오는지 아는 사람?”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허름한 허세를 부리고 싶어 조바심이 났다. 나는 손을 들고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 나오는 문장이라고 대답했다.

그 일이 있은 후 반 아이들 중 몇은 나를 책 많이 읽는 친구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자꾸 내게 책 이야기를 건넸다. 나는 때때로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자주 우쭐하고 교만했으나, 또 꼭 그만큼 자주 의기소침하고 굴욕스러워했다. 내가 읽은 책이라고는 『데미안』이 유일했기 때문이다. 유일한 것은 쉽게 전부가 된다. 하나의 세계가 된다.

나는 싱클레어고 곧 데미안을 만날 것 같았다. 1학기가 다 가도록 데미안은 나타나지 않았다.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는 법. 나는 데미안을 찾기 시작했다. 보면 바로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이마에 표적을 갖고 있을 테니까. 선생님이 숙제를 내주고 잠시 교실을 나간 사이 나는 반 아이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펴보다가 맨 뒷자리에서 항상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앉아 있는 한 아이를 발견했다. 그는 전혀 숙제를 하고 있는 학생처럼 보이지 않고, 자기 자신의 문제들에 전념하고 있는 연구자 같았다. 쉬는 시간에도 그 아이의 자세나 표정은 바뀌지 않았다. 말을 걸기 위해 다가갔을 때 나는 알 수 있었다. 그 자세, 그 얼굴로 아까부터 그 녀석은 자고 있었다는 사실을.

2학기 때 나는 미술부에 들어갔다. 3학년 선배의 이마에 뚜렷한 표적이 있었다. 그 얼굴은 내게, 한 순간, 남자답거나 어린이답지 않고, 나이 들었거나 어리지 않고, 왠지 수천 살은 되게, 왠지 시간을 초월한 듯, 우리가 사는 것과는 다른 시대의 인장이 찍힌 듯 보였다. 학교 밑 중국집 2층에서 짬뽕 국물에 소주를 마시던 선배가 말했다. “금지된 것을 하면 대단한 악당이 될 수 있지. 거꾸로, 악당이라야 금지된 일을 할 수 있기도 하고 말이야.”

그 선배야말로 데미안이라고 확신했다. 나는 그를 따라다니며 선배처럼 담배연기로 도넛을 만들고 술을 마시기 전에 잠깐 술잔을 째려보았다. 한 번은 그의 집에 갔다가 어머니를 보았다. 어머니는 거의 할머니에 가까웠다. 선배는 늦둥이였고 말썽꾸러기였다. 어릴 때부터 위험한 짓만 골라 해 어머니를 더 늙게 만들었다. 이마의 상처도 어릴 때 담 위에서 뛰어내리다 다친 상처라는 것이다.

선배도 졸업하고 나는 2학년이 되었다. 여전히 데미안은 찾지 못했다. 나는 벌써 오래전부터 더 이상 좋은 학생이 아니다. 퇴학당하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으리라. 오전 수업시간 내내 자다가 무단 조퇴하려던 내게 우등생 짝이 말했다. 조롱일 수도 진지함일 수도 있는 환하고, 무언가 말하는 듯한 눈으로. “넌 한 번도 너 자신이 데미안이라는 생각을 해보지는 못했니?”

나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래. 한 사람 한 사람은 그저 그 자신일 뿐만 아니라 일회적이고, 아주 특별하고, 어떤 경우에도 중요하며 주목할 만한 존재이다. 우리는 모두 그런 데미안인지 모른다.

“그런데 미안, 그런 말이 아니었어.” 얼마 전 동창회에서 만난 짝은 그때 자신이 한 말을 전혀 다르게 기억했다. “넌 한 번도 너 자신한테 미안하다는 생각을 해보지는 못했니?”

** 컬러 부분은 모두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결혼정보회사 듀오의 기획부장이다. 눈물과 웃음이 꼬물꼬물 묻어나는 글을 쓰고 싶어한다. 『아내를 탐하다』 『슈슈』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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