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신저 외교 방식 수정될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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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헨리·키신저」 미 국무장관의 「신기」에 격찬이 쏟아졌던 73년을 그에 대한 평가 곡선의 정점으로 친다면 현재 그 곡선은 최하점으로 곤두박질쳐졌다. 73년1월 그는 그토록 어려운 월남전에 대한 휴전 협정을 조인했으며 같은 해 10월 중동전이 터지자 수주일만에 그는 휴전과 군 격리 협정을 마련했다. 미국 신문들은 그를 초인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으며 어떤 어려운 외교도 그가 개입하면 저절로 실마리가 풀릴 것 같은 과장된 명성이 그에게 후광처럼 깃들게 되었다.
그러나 「키신저」 생애 최고의 해를 장식했던 이 양대 업적이 최근 동시에 무너져 내리자 그의 초인적 능력은 하나의 환상에 지나지 않았지 않았느냐는 회의가 과거의 찬사와 같은 열도로 밀려나오고 있는 것이다. 이 커다란 반전의 이유는 어디 있는 것일까?
「키신저」는 73년 유대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미 국무장관 자리에 지명된 직후 자신의 PR활동을 통해 미국 외교 정책을 수행해 나갈 자신의 방침을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첫째, 미국 외교는 임기응변식 위기 관리를 탈피하여 유기적으로 어떤 위기나 일관성 있게 대처할 수 있는 외교의 구조를 마련해야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그가 재야 시절에 늘 주장해온 바 외교는 어떤 철학의 바탕을 가져야 한다는 지론이 포함되어 있었다.
둘째, 외교는 어떤 한사람의 능력에만 의존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미국이 앞으로 추구하는 모든 정책은 국민들의 의견 통일과 의회의 동의하에 추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월남전으로 분열된 국론과 자신의 독주에 대한 비판을 의식한 말이기도 했다.
그러나 돌이켜 볼 때 「키신저」 외교의 특성은 이와 같은 자신의 주장과는 정반대였다. 그가 추구해온 정책들은 모두가 너무나 현실주의에 치우쳐 있으며 놀라울 정도로 임기응변적이었다.
월남전의 경우 최근 휴전 협정이 실질적으로 파기되는 상황에 직면하자 그는 만약 2년 전에 의회가 지금처럼 대 월남 군원을 억제하는 사태를 예견했더라면 자기는 협정에 조인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탄했다. 그러나 당시의 여론으로 보아 현재의 사태는 충분히 예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키신저」와 그의 보좌관들은 당시에 자신들이 체결한 휴전 협정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월남의 장래에 대해 만약 「베트콩」이 무력이 아닌 정치적 방법으로 월남을 공산화할 때 이에 반대하지 않겠다고까지 말한 바 있다. 「키신저」의 한탄은 기실 자신에 대한 한탄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50만명의 미 지상군의 투입으로도 승리하지 못한 전쟁에서 미군이 철수한 후 군원 만으로 전쟁을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몰랐을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는 마땅히 후속 조처로서 정치 협상을 위해 「티우」에게 압력을 가 했어야 했지만 그가 그런 압력을 가했다는 증거는 찾아볼 수 없다.
중동전의 경우는 그가 초기에 거둔 자신의 성과에 너무 도취한 결과 2단계 협상에서 마땅히 소련의 조력이 동원되었어야 할 객관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를 배제하고 독주함으로써 실패했다고 그의 비판자들은 비난하고 있다. 그 결과 미국은 중동에서 큰 외교적 손실을 받을 뿐 아니라 미·소 화해에도 금이 가고 말았다.
이밖에도 「뱅글라데쉬」 전쟁 때 미국이 「파키스탄」의 무모한 살육전을 억제할 수 있는 영향력을 갖고 있었으면서 이를 행사하지 않은데 대해 「키신저」의 냉혹성이 비난을 받고 있고 「그리스」계에 의한 「키프로스」「쿠데타」와 여기서 유발된 「터키」의 「키프로스」 침공 과정에서 미국이 보인 무력도 「키신저」 공박의 자료가 되었다. 이 결과로 미국은 「나토」의 동부 전선을 맡고 있는 이 두 동맹국을 자칫 잃어버릴 위험마저 안고 있는 것이다.
「키신저」외교의 실패는 70년대 초반을 통해 미국 외교의 지주가 되어온 신판 포함 외교방식에 제동을 걸게 될지도 모른다.
월남전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그는 「하노이」 폭격과 월맹 해안 봉쇄를 설득 수단으로 썼으며 「아랍」 산유국들의 유가 인하를 유도하는 방법으로 무력 개입을 위협했다. 또 「이스라엘」·「파키스탄」 등에 대한 무기 공급 재개도 외교 방법의 하나로 이용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방법은 94대 의회가 인지와 「터키」에 대한 군원 억제에서 보여주듯이 앞으로 별 효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되었다.
「키신저」가 동남아 사태로 자신의 중동 전 협상이 타격을 받게 될 것이라고 우려한 것도 이 두 지역에 다같이 작용해온 미국 무력에 의한 공포 심리가 미 의회의 동남아 군원 억제로 무력화해 가고 있음을 경고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키신저」가 중동 협상 실패를 선언하면서 『이제 우리는 새로운 방식, 새로운 협상 형식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 것은 단순히 중동 문제의 방법론에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 외교 전체에 대해서도 적용되는 수정의 필요성을 지적했다고 볼 수 있다. 그와 같은 수정이 가해질 때 외교 주역도 바뀔 가능성은 「키신저」가 자신을 미국 외교의 대명사처럼 불리게 만든 1인 독주 외교술을 구사해왔기 때문에 더욱 큰 것이다. <장두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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