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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평가 받는 작고 화가 황술조|망각 30여 년…유화 20여점·「데상」등 발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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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우리나라 근대 미술의 풍성한 개화기였던 1930년대의 유화가 토수 황술조씨의 유 작품이 30여 년만에 일괄해 나와 망각 속에 묻혀 버렸던 한 작가의 면모를 다시 평가하게 됐다.
1939년 36세로 요절한 황씨는 경주에서 작가생활을 했을 뿐더러 발표된 양도 적어서 이제까지 알려진 유 작품으로는『개』라는 모필「데상」한 점(이마동 소장)만이「한국 현대미술가 유 작전」(62년) 이나「한국미술 60년 전」(72년)을 통해 겨우 선보였을 따름이다.
그런데 최근 유가족이 간수해 오던 대표작『연』을 비롯한 유화 2여 점과 석고「데상」 등이 모「컬렉션」에 한몫 들어갔고 그밖에 수 점이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져 미술계는 커다란 수확으로 주목하고 있다. 한국근대미술사상 가장 주요한 시기임에도 거의 공백상태에 있던 30년대의 작품으로서 그 작품이 집중적으로 유존하는 예는 이인성씨에 이어 황씨가 이제 두 번 째로 꼽힐 만하게 된 것이다.
근대미술사장 1920년대가 초창기라면 30년대의 한국 화단은 군웅할거의 꽃피는 시기. 재능 있는 미술가들이 해외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좋은 작품을 보여주던 시기였다. 그럼에도 수십 명에 달하는 당시 작가들은 대체로 이름만이 전할 따름이며 현존하는 작품은 극히 적은 형편이다.
그 동안 해방과 동란이 겹쳐 작품들이 없어진데다가 공식적인「컬렉션」과 연구하는 사람도 없어서 모두 무관심 속에 망각돼 왔다.
해방 후 처음으로 공개된 황씨의 작품은 황씨의 형수 (경주시황오동)가 작품들을「캔버스」만 뜯어서 한 두름으로 묶어 보관했던 것.
그래서 화면은 많이 손상됐으나 그런대로 한 작가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계기가 된 것이다.
미술평론가 이구열 씨는『제대로 작품을 대할 수 없어 재능 있는 작가였다 고만 증언을 들을 뿐이었는데, 이처럼 사회의 보호 없이 방치돼 온 30년대 작가의 유 작품이 일괄해 수습된 것은 매우 다행한 일』이라고 말한다.
이경성 홍대 박물관장은『공간설정이 시원하고 현대적 감각이 풍기는 작품들』이라고 평가하면서『연』의 경우「모네」를 연상시키면서도 한국불화에서 나오는 도식적인 느낌을 준다고 말했다.
1904년 경주의 부유한 가정에서 차남으로 태어난 황씨는 동경미술학교에서 유화를 공부하고 개성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으나 대부분의 생활은 고향에서 했으며 경주박물관 창설에도 적잖이 공헌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점 그의 작가활동과 인품 및 취미생활에 관하여 고리승만 화백은 다음과 같이 술회한 바 있다.『섬광이 빛나는 아주 격 높은 작가였는데 그만 게을러서 작품이 드물다. 코 밑 수염을 기르고, 언제나 웃는 얼굴인 그는 침착하고 온정이 넘치는 인품이었다.
취미도 다방면이어서 추사의 글씨를 좋아하고 불상을 수집하며 다도와 조원·목공예에 걸쳐 일가견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양요리 솜씨도 능란했다고 한다. 30대에 요절했는데 애석한 사람의 하나다.』황씨는 말년 한 때 서울에 머물러 있었고 인후결핵으로 인천에서 요양하다 작고했다. 그의 마지막 유 작전은 40년 7월 화신백화점 화랑에서 열렸는데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현존 것보다는 훨씬 많은 작품들이 출품됐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일제의 총독부가 주최하는 선전에는 일체 출품하지 않고 서화협회 협 전에 만 참가했던 것으로 전한다. 고희동씨 중심으로 한국인만이 참여한 이 협전은 당시 민족문학운동의 자각현상으로 풀이할 만한 재야의 미술잔치였다.
그 무렵「조선화가총평」을 한 이하관씨는『씨의 작품은 선전에서 구경하지 못하지만 열정적인 성격을 엿보여 가장 기대하는 화가의 한 분』이라 했고(조광 1931년 6월 호) 또 고유섭씨는『황군은 선이 없어도 강한 힘이 있어 보이며 이 문제는 일반 회화 논의 큰 문제인데 전체에 있어서 조각 적 묘법에 의한 작품』이라고 주목했었다(1931년 협전 관평).
현존하는 작품들은『여인좌상』『누드』『정물』및 풍경화와 자화상 등 초기 인상파의 경향을 띈 차분한 작품들.
그 중 수 점은「고호」와 같은 선의 움직임으로 대담하게 시도한 작품도 엿보여 그의 습작시대의 한 면을 보여주는 듯하다. 하지만 그는「모네」「세잔」「보나르」등의 작품에 심취했던 것으로 보이며 건강하고 해맑은 화폭 속에 한 시대의 우수와 고독을 담고 있다.
그의 미망인 이무수 여사(66)는 지금 경주에 생존해 있고 또 무남독녀 황수열 여사도 있지만 모두 미술계와는 먼 거리여서 한 작가의 화 업에 대해 까맣게 잊고 있는 듯 하다.

<이종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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