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일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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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국일관이 불탔다.
나이든 주선들은 일말의 감회가 없지 않을 것 같다. 하긴 그럴 만한 인걸들도 이젠 몇이 없다. 거의 불귀의 객들이 되었으며, 주사만 우두커니 남아 노 추를 보여주고 있었다.
국일관이 서울 장안에 나타난 것은 1920년. 부인용품 상을 하던 사람들이 지은 요리 집으로, 상당한 규모였다.
이 무렵은 망국의 우수가 모든 사람들의 일상을 우울하게 만들던 때였다. 나라를 잃은 울분, 벼슬을 빼앗긴 좌절감, 혹은 기우는 가세를 지키는 지주들의 초조감. 한편에선 새로운 권세를 누리며, 별천지를 만난 기회주의자들의 방탕, 일제 관료 배들의 방 자가 넘실대던 세태였다.
국일관·명월관·식도원 등 유명 관은 이런 사회의 분위기가 만들어 낸 요리 집들이었다.
1934년 만송(이기붕)이 잠시, 국일관의 총지배인(전무)을 지낸 일이 있었다. 그는 막 미국에서 돌아와 마땅한 취직 자리가 없었고, 또 미국 유학생이 발을 붙일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다. 만송은 한때 콩나물 장사를 한 일이 있었는데, 그런 인연으로 국일관의 식객이 되었던 것 같다. 그가「보타이」를 매고 현관에 나선 일은 없었다지만 아무튼 한 일화는 된다.
그 무렵 서울 장안의 주선들은 세 무리로 나뉘어 몰려다녔다고 한다. 명월 관은 명문 출신들이, 국일관은 신흥 부호들이, 식도 원은 일제 관공리들이 주로 드나들었다.
하지만 이런 시속은 어느덧 사라지고 태평양전쟁과 함께 세상은 더욱 어지러워졌다. 기녀들은 치마·저고리를 벗고 이른바「몸뻬」차림이 되는가 하면 전쟁터에까지 끌려나가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요리 집들이 한때나마 우국지사들의 술자리가 되었다는 것은 어딘지「아이러니컬」하다. 술이나 마시며 우국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여유가 있었다고 할까. 그런 여유 있는 애국은 오늘의 상황에서 보면 차라리 「로맨틱」했다고 나 해야 할지.
광복 후엔 역시 그 사회의 면모를 거울처럼 비쳐 주는 곳이 이런 주사의 안방이었다.
남로당의 지하활동이 있었는가 하면, 미군정의 야사도 이런 데서 엮어졌다. 「카바레」, 「댄스」와 같은 양 풍의 습속이 익혀진 곳이 바로 여기였다. 요정정치라는 말이 만들어진 것도 그 무렵의 세태를 반영한 것 같아 냉소를 짓게 된다.
세속은 바뀌어 이젠 그런 이야기들이 옛날의 노래 가락처럼 어설프게만 생각된다. 사람도 가고, 집도 사라지고, 그 자리엔 어떤 풍속들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시정 인들의 귀엔 설 지만 무슨 각들이 기라성처럼 서 있는 세태이고 보면 아직도 별세상은 어딘가에 있을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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