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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7)제44화 남북협상(7)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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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북행 전야>
백범의 북행채비는 경교장에 소용들이치는 반대시위 속에 이루어졌다.
북행단안 이후 영변의 안전을 걱정하는 황해도고향 친지들을 비롯, 정치적으로 남북협상을 반대하는 대동청년단·전학련 등 각종 청년단체들에 이르기까지 경교장에 몰린 반대세력은 각양각색이었다. 『가시면 못 돌아옵니다』『공산당과의 대화 절대반대』 등 저지의 부르짖음은 연기마저 내뿜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극성은 임정환국환영위 간부였고 당시 한독당 옹진지구 책임자이던 도인권 목사였다. 예비검 속에 걸려 서대문형무소(현 서울구치소)서 옥살이를 한 독립투사로 같은 황해도(백범은 해주·그는 옹진)인데다 나이 또한 백범보다 한 두 살 아래여서 『형님, 형님』하며 따르던 이.
그는 백범이 무사 귀환될 리 없다고 굳게 믿고 아예 경교장서 침식을 하며 북행중단을 호소했으며 전혀 먹혀들지 않자 『자네 어떻게 하려고 보고만 있느냐』고 신씨에게 연기라도 시키라며 성화를 부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신씨는 한번은 연기론을 펴러 들어가 놓고 『내가 「김구타도」가 무서워 못 갈 것 같으냐. 쓸데없는 소리…. 김일성과 얘기할 사람은 나밖에 없어. 미루다니, 하루가 급한데 무슨 말이냐』는 일갈에 『아버님, 소신껏 하십시오』하고 엉뚱하게도 용기만 불어넣고 물러나왔다. 게다가 동행까지 자청하고 나서 싸움을 하라고 들여보낸 것이 오히려 이적행위(?)가 된 꼴이었다.
일이 이렇게 빗나가자 도 목사는 최이권(백낙준씨 부인·안악) 최이순(이대교수)씨 자매를 비롯, 알만한 고향사람들을 총동원, 북행중지 설득의 파상공세까지 벌였다.
그러나 한번 먹은 백범의 결심이 흔들릴리는 만무한 것.
우리들 비서진은 북행 전날인 4월18일 밤 마침내 짐을 꾸렸다.
당사람들은 따로 가기로 해 우리 일행은 백범과 신씨 부자와 필자 등 단 3명으로 낙착.
짐이랄 것도 없었다. 그 때 우리가 꾸린 것은 백범이 갈아입을 한복 한 벌인가 두 벌인가 하고 신씨와 필자의 「와이샤쓰」 2개·담배·세면도구가 전부였다. 담배는 「시」자가 찍힌 50개비들이 비매품 다섯 보루와 「러키·스트라익」 2보루였다. 「시」자가 찍힌 비매품은 당시 정부고관 등에의 선사용으로 만들어내던 것으로 경교장에 늘 담배를 대주던 의주로전매청공장장 최모씨가 북행소식을 듣고 신씨와 필자에게 객초나 하라고 그 날 낮 갖다준 것(백범은 담배를 안 피웠음)이며 「러키·스트라익」은 아무래도 담배가 모자랄 것 같아 필자가 샀다(당시는 미제담배를 흔하게 피울 때였다).
그리고 세면도구는 치약 1개(당시 흔했던 「콜게이트」), 칫솔 하나씩 3개, 쓰던 비누(럭스) 1개와 수건 2장(1장은 백범용, 1장은 우리 것)-. 「버튼」을 누르면 「렌즈」가 툭 튀어나오는 나의 구식 「카메라」1대까지 합쳐 짐을 통틀어도 길이 세 뼘, 폭 두 뼘, 높이 한 뼘의 요새 007가방 남짓한 구식가방 1개가 다 차지 않았다.
백범을 위해 따로 마련한 것이라곤 한복 외에 고작 수건 1장을 더 넣은 것뿐인 초라한 짐이었으며 흡사 가까운 나들이나 하는 듯한 여장이었다.
모든 채비를 갖춘 이날 밤 백범은 삼청장 김 박사에게 내일 아침 떠나기로 연락을 마치고 조용히 생각에 잠기는 것이었다. 『본래는 한 나라, 누구나 오갈 수 있던 그 허리에 마의 38선이 굳어져 가는 정세-.』
백범은 끈덕지게 가지 말라고 물고 늘어지는 도 목사와 마주 앉은 채 밤이 깊어가는 데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뜻이 통할지 안 통할지 미지수의 북행을 앞두고 만감이 엇갈리는 모양이다. 보다 못해 신씨가 미닫이를 열고 들어가 말벗이 되어드리기로 했다.
『신아, 나는 배우지는 못했어도 애국애족하는 마음은 누구보다 못잖아. 왜병을 죽이고 사형선고까지 받아봤고, 독립운동을 하느라고 중국땅에서 별의별 일을 다해봤다. 이번 길이 어려운 줄은 안다. 그러나 가지 않을 수 없는 길….』 신씨를 앞에 둔 백범의 말은 북행의 의미를 마지막으로 되씹어보는 차라리 독백이었다.
자정이 넘어서야 도 목사는 백범 옆방인 「다다미」방으로 건너가고 경교장의 밤은 조용히 깊어갔다.
이어 날이 새고 역사적인 북행의 장도에 오른 1948년4월19일.
경교장은 아침 일찍부터 출발 채비를 서둘렀다.
백범이 자신의 신변을 끝까지 걱정해준 도목사와 2층 「다다미」방에서 겸사응로 아침식사를 한 것은 7시30분께.
변공실장인 엄홍섭씨(당시 40대·엄항섭씨의 동생)와 필자는 잔무협의로 마치고 현관에 차를 대기시킨 다음 백범 거실을 「노크」했다.
『준비 다 됐습니다. 선생님, 가십시다.』 <계속><제자 선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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