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의 영성, 미술의 영혼'만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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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흙빛 법복을 걸친 틱낫한(77) 스님은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느린 걸음으로 건물에 들어섰다. 두 손을 모은 채 아주 천천히 사람들과 언저리를 둘러봤다. 형형한 눈빛이 불을 켠듯 빌딩 숲에 둘러싸인 칙칙한 도심을 밝혔다.

미술이 지닌 정신성을 찾아 나선'마인드 스페이스(mind space)'전(5월 18일까지)이 열리고 있는 서울 순화동 호암갤러리는 한숨에 성소(聖所)처럼 변했다. 스님을 알아본 행인들이 합장하자 그는 깊이 고개 숙여 화답했다.

베트남 출신의 평화운동가 틱 스님은 국내에서 출간돼 화제가 된 '화' '마음에는 평화 얼굴에는 미소' 등 생활 속에서 행복을 찾는 수행법으로 인상깊은 우리 시대의 성자다.

명상 수행 공동체 '플럼 빌리지'를 이끌고 있는 틱 스님이 빡빡한 한국 방문 일정 중에도 호암갤러리 전시를 찾았다.

미술 작품으로 현대문명이 뿜어내는 독을 치유하자는 '마인드 스페이스'전은 욕망.화.두려움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자는 스님의 말씀과 예술이 서로 통하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수행자 20여명과 함께 한 스님은 전시장 들머리부터 작품에 집중하는 모습이 남달랐다.

인간의 실존과 고통을 초월해 절대적인 영원성으로 나아가고자 했던 마크 로스코(1903~70)의 그림 앞에서 틱 스님은 발걸음을 멈추고 머물렀다.

스님이 "음~"하는 공감의 탄성을 낸 곳은 애니시 카푸어의 작품이 걸린 두 번째 방에서였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안소연 삼성미술관 수석연구원이 "작가가 인도의 문화에서 영감을 많이 받고 힌두교에 심취해 그 영향을 작업의 에너지로 삼았다"고 설명하자 틱 스님은 출품작인'나의 몸 당신의 몸'을 꼼꼼하게 살폈다. 그 순간, 스님이 말문을 열었다.

"'마인드 스페이스'라는 전시 제목이 참 뜻깊습니다. 우리가 곧 우주요, 숨쉬는 우리 몸이 곧 자유입니다. 꽃처럼 피어나고, 산처럼 단단하고, 땅처럼 든든한 우리 마음이 곧 영성입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노래가 울려퍼졌다. '플럼 빌리지'에서 수행자들이 부르는 '찬가(챈트)'였다. 손짓을 섞어 부르는 나직한 노랫소리가 '내 안으로의 여행'을 내세운 전시 작품들과 어울려 소리로 빚은 한 폭의 풍경이 되었다.

"들이쉬며 내쉬며, 들이쉬며 내쉬며, 꽃처럼 피어나네. 이슬처럼 맑으네. 산처럼 단단하고, 땅처럼 든든하네. 자유~ 자유~ 자유~."

노래를 부르는 수행자들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몇 사람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미술이 지닌 영혼과 종교가 지닌 영성이 합일한 희귀한 순간이었다.

스님 일행을 안내하던 한상만(명진출판사)씨는 " 찬가를 부르는 건 그 장소에 내리는 스님의 축복이다. 한국에 온 뒤 처음 있는 일이다. 틱 스님이 이 전시에서 깊은 인상을 받으신 것 같다"고 말했다.

정명진.정재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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