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러기/틴틴] '하노이의 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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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이의 탑/네가미 세이야 지음, 서혜영 옮김, 해나무, 8천원

'하노이 탑'이라는 퍼즐을 아시는지. 세 개의 막대 중 한 곳에 크기가 서로 다른 원판들이 꽂혀 있다. 반드시 제일 작은 원판이 맨 위에 오도록 크기 순으로 꽂는다.

이 원판들을 다음 막대로 고스란히 옮기는 것이 퍼즐의 핵심이다. 이 때 원판은 한 번에 하나씩만 옮길 수 있고 어떤 경우에도 작은 원판 위에 큰 원판이 놓여서는 안 된다.

1883년 프랑스의 한 수학자가 소개한 이후 널리 퍼진 하노이 탑 퍼즐에는 유명한 전설이 따라다닌다. 프랑스의 한 사원에 세상의 중심을 표시하는 돔이 있는데 그 돔에는 세상을 창조할 때 신이 쌓아놓은 탑이 있다는 것.

커다란 구리판 위에 세 개의 다이아몬드 기둥이 서 있고 그 중 한 기둥에 순금으로 된 64개의 원판이 크기 순으로 쌓여 있었다.

승려들이 한번에 원판을 한개씩만 옮겨 다음 기둥으로 다 옮기면 탑도 사원도 세상도 먼지가 되어 모두 소멸할 것이라는 이야기다.

일본 수학자가 1999년 펴낸 이 책은 하노이 탑 퍼즐과 거기에 얽힌 전설을 모티브 삼아 써내려간 '수학소설'이다. 수학자의 별난 삶을 다룬 소설이나 에세이는 많지만 수학을 전면에 내세운 소설이라니, 우리에겐 낯설 수밖에 없다.

그러나 결론부터 얘기하면 엄지를 불끈 세워 추천할 만한 책이다. 수학 소설인 만큼 어쩔 수 없이 간단한 수식이나 컴퓨터 프로그래밍 이야기도 나오지만 건너뛰어도 무리가 없을 뿐더러, 수학과의 두뇌싸움을 피하지 않는다면 대단한 지적 쾌감을 맛볼 수 있다.

소설은 전설 속의 하노이 탑이 프랑스가 아니라 베트남의 하노이에 있을 거라는 가정을 깔고 진행된다. 이어 과연 64개의 원판을 가진 하노이 탑을 다른 기둥으로 옮길 수 있을까, 의문을 던진다. 수학자인 주인공은 일단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걸 깨닫는다.

왜냐하면 64개 원판을 모두 옮기려면 하나를 옮기는데 1백분의 1초로 잡더라도 물경 58억년이 걸린다는 계산이 나오기 때문이다(참고로 원판의 개수를 n이라고 하면 모두 옮기는데 필요한 횟수는 2의 n제곱에서 1을 뺀 만큼 걸린다. 원판이 64개면 2의 64제곱!).

그러나 원판을 옮기는 법칙을 발견한다면 대대손손 이어가면서 가능할 수도 있지 않을까. 소설의 백미는 이 법칙을 발견하는 과정에 있다. 특히 만다라에서 그 해법의 힌트를 찾는 장면에서는 저자의 해박함과 폭넓은 식견에 놀라게 된다.

또 다른 재미는 세 기둥을 각각 '물질의 원리''인간의 원리''제3의 원리'로 부르면서 '물질의 원리'라는 기둥에서 '인간의 원리'라는 기둥으로 이동할 때 인간 세계가 진정 해방되리라고 설명하는 부분이다.

여기서 '제3의 원리'는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초월적이지만 늘 현실에 작용할 수밖에 없는 실체로 간주된다.

퓨전이라는 말이 유행이다. 그건 단순히 서로 다른 요소들을 섞는 '비빔'과는 다르다. 수학과 철학과 인문학을 섞어 웅대한 소설을 엮어낸 이 책은 퓨전의 진수를 보여준다. 부럽다-.

이영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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