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춘대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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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홀도운간수안회
갱봉산상일화개
하변숙기영방초
임하경풍대낙매
구름 사이로 북으로 나는 몇 마리의 기러기 떼 문득 보이고, 산 위에 피어난 한 송이 꽃도 만나. 개울가에 어리는 따뜻한 봄기운은 새싹을 맞아줄 듯, 숲 사이를 스치는 가벼운 바람은 낙매를 기다릴 듯.
당대의 시인 손적이 입춘에 읊은 시의 한 구절이다. 요새같이 바삐 돌아가는 세상에 누가 한가롭게 음력까지 따져가며 살겠느냐고 생각할 것만은 아니다고 이번 달 월급으론 누구의 빛을 갚을까를 생각하며 만원「버스」에 몸을 담고 「계몽」에 바쁜 운동장 옆을 지나가는 도시의 서민이라도, 왜 날씨가 좀 풀렸나 했더니 입춘이었구나 하며 저마다 잠시는 봄 생각을 하는 과히 불행하지 않은 순산을 가질 테니 말이다.
해마다 한 차례씩은 맞아본 봄이요, 그때마다 별로 신통한 일도 없이 지냈음은 뻔한 노릇이지만, 그래도 『이번에 봄이 오면…』하고 부질없는 생각을 하게 된다. 웅크리고, 쭈그리고 지낸 끝이라 분수도 모르고 활개치고 싶어진다.
그러기에 이성계 일파가 득세하여 고려왕조의 종언이 눈앞에 보이는데도 이색은 봄기운을 느끼자 매화를 찾는 시조를 남겼으며, 조선왕조가 창건되자 세상을 버리고 치악산에 숨어살던 원천 석도 입춘이라니 한 수 없을 수 없었던 것일까.
입춘의 풍습으로는 춘첩이 있다. 「입춘대길」과 같은 간단한 축련을 써서 대문에 붙인다. 좀 욕심이 사나운 집에서는 「개문만복래, 소지황금출」따위의 문자를 쓰기도 한다.
추사 김정희가 7세 때에 역시 춘습을 붙였다. 우연히 그 앞을 지나던 영의정 채제공이 글씨에 끌려 들어가 보니 김노경의 집이었다. 채제공은 『당신 아들은 명필이나 능서 하면 명도가 기구하겠다』는 말을 남겼다던가. 과연 추사는 필명을 남긴 대신 귀양살이로 생애를 마치다시피 하였고 후사도 없었다.
이 일화가 널리 퍼지지도 않았을텐데도 요즈음은 춘첩이 없다. 농촌까지도 「슬레이트」로 근대화된 탓일까. 춘첩이라면 「새마을운동」을 역행하는 풍습 같기도 하다. 그러나 「유신과업완수」나 「1백만 불 수출 대신 「국태민안」이니 「가급인족」이라고 써도 뜻은 같다.
중공에서는 「입춘대길」대신 「비림비공」을 붙였다던가. 그들 가운데 공자를 존경하는 사람이 있기로 「배모척주」란 춘첩은 감히 생각도 못하겠지만, 우리와 같이 자유가 있는 나라에서는 각자의 뜻에 따라 「국론통일」이나 「민주회복」등을 마음대로 붙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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