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 때문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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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기쁨의 말을 하렵니다. 유년의 햇빛처럼 찬연한 그 말을 하렵니다. 언제부턴가 잊어온 말, 그러나 사시사철 솟구쳐 오르고만 싶었던 그 줄기찬 충동을 여기 풀어놓겠습니다. 축일전야의 흥분, 수북하고 뻐근하게 마치도 홍역 앓이 시초의 신열처럼 참 이상하고 이상하면서 못견디겠는 그 증상을 헤쳐 놓겠습니다.
지금 세태에 기쁨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고 하실 분에게, 사실은 나의 절반도 이에 공감하면서 더듬거리는 서툰 말씨로 기쁨의 얘기를 띄워보냅니다. 죽음의 유형지에서 시인 육사가 마지막으로 노래했던 꽃 을,그는 절명 지 옥사에서 피 빛 선연한 생명의 꽃을 읊어 후일에 남겼거늘 죽음 앞에서 최후로 솟았던 노래, 절대의 미학, 추상의 그 꽃을 오늘 날 이 암울한 땅위에 다시 가꾸자는 그 뜻을 뜨겁게 뜨겁게 내가 말하렵니다.
친구여, 생각해 보십시오.
꽃철의 낭만 한 백화는 다만 꽃일 뿐이나 만물을 얼어붙게 하는 결빙기 혹한의 개화는 훨씬 더 꽃 이상입니다. 꽃이 꽃 이상일 때 이 얼마나 빛 부신 존재의 광채입니까. 무릇 모든 생명은 갈수록 그 값어치를 상승시켜 가치의 충일에 나아가야 합니다. 한 송이의 꽃도 꽃이 상이려 원하는 지향에 내달릴 때 여기 비로소 존재의 복락과 스스로운 기쁨이 깃 든다고 할 것입니다.
친구여, 또 생각해 보십시오.
이 세상 무엇이라도 그림자 없이 혼자서만 태어나진 않습니다. 기쁨은 슬픔과 함께 소망은 낙망 속의 핵으로, 서로 짝을 지어 생겨납니다.
그러기에 먼길을 춥게 온 그 사람만이 노변의 따스함을 알며 비탄의 막바지에도 이르러 본 이가 동녀처럼 통곡하게 하는 위안의 품을 마침내 만납니다. 젊었을 땐 몰랐던 삶의 만감과 갈수록 깊어지는 온갖 음미의 그 저류를 굽이굽이 흘러온 청옥 빛 물줄기의 그 기쁨을 우리는 다 함께 누릴 수 있습니다.

<행복한 것 중의 하나는 두통이 없는 일>이라고 무명의 한 젊은 시인은 읊고 있습니다. 그 소박한 지혜는 몇 번이라도 미소를 자아냅니다.
어느 때 세상이 햇빛 투 성이 듯이 사람 나름의 조명 나름으로 삶 또한 기쁨 투 성일 수가 있을 듯 합니다.
내 친구여, 기쁨에 대해 나는 말하렵니다. 기쁨 때문에 자주 바쁘고 기쁨 때문에 때때로 참을 수가 없다고 말하렵니다. 마음깊이 품어 덥히는 것에게, 아아 몽매간에도 껴안고 있는 상념에게 주홍의 불이 당겨, 붙으면 내 몸도, 내 영혼도 인이 칠해진 듯이 환히 불빛을 뿜어냅니다. 진정 그러한 기쁨이 있음도 말하겠습니다·그리고 혹시 원하신다면 내 기쁨을 공손히 당신과 나누겠습니다. 내 기쁨 전부를 원하시면 한꺼번에 모두다 드리겠습니다.
그 다음 나는 또 기쁨을 만들 수가 있을 테니까요.
김남조<시인·숙명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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