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 오후 3시30분 서울 성동구 홍익동 한국기원 1층 바둑TV 스튜디오. 바둑에서 신의 경지에 올랐다는 신산(神算) 이창호(39) 프로바둑 9단이 고개를 떨궜다. 상대는 윤준상(27) 프로바둑 9단. 검은 돌을 잡은 윤 9단은 304수 만에 1집반승을 거두며 제15기 맥심커피배 입신최강전 8강에 합류했다.
이날 양복을 입었던 이창호 9단과 달리 윤준상 9단은 해군 병사들의 정복인 독특한 큰 옷깃의 세일러복을 입고 있었다. 윤 9단은 현재 해군 작전사령부에서 정훈병(상병)으로 복무 중인 현역 군인이다.
임명수 해군 공보파견팀장(중령)은 “윤 9단의 대회 참석은 해군 바둑병 활동의 일환”이라며 “휴가가 아닌 파견 형식이라 복장도 규정대로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해군은 2011년 정원 10명의 바둑병 제도를 도입했다. 이들의 공식적인 병종(육군의 주특기)은 갑판병이지만 인사규정에 바둑병을 세부 직능으로 두도록 하면서 윤 9단을 비롯해 허영호·백홍석 9단 등 차세대 주자 10명이 바둑병으로 복무하고 있다. 유영식 해군 정훈공보실장은 “한국기원의 요청에 따라 바둑병 제도를 도입했다”며 “바둑병들은 일과시간에 정훈업무를 하고 일과 후 장병들에게 바둑 교육을 하거나 개인적으로 바둑 연구를 하며 감을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회에서의 경력을 군에서도 유지하고, 군도 이들로부터 재능기부 형식으로 도움을 받는 윈-윈 전략이다.
‘군대에 가면 썩는다’는 통념과 달리 국방부와 육·해·공군은 사회 경력을 군에서도 유지할 수 있도록 다양한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국방부가 운영하는 국군체육부대(상무)가 대표적이다. 각 군에서 관리하던 체육 특기자를 모아 1980년 창설된 상무는 축구·야구·농구·사격 등 28개 종목의 선수들이 현역으로 복무하고 있다. 최근에는 아이스하키팀도 신설했다. 그러나 연예병사제도는 지난해 해당 병사들이 지방 공연 도중 유흥업소를 출입하는 등 물의를 빚자 폐지했다.
병사들의 주특기를 220가지로 분류하고 있는 육군은 44개의 전문특기병 제도를 도입했다. 영어·아랍어 등 8개 언어 어학병, 모터사이클 할리데이비슨을 타고 복무하는 MC(Motor Cycle)승무병 등도 있다. 최용환 육군 공보과장은 “사회 경력과 군 활용을 연계한 특기 기준을 재분류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 결과 보일러를 전문으로 담당했던 보일러병은 사라졌지만 소프트웨어관리·개발병, 유해발굴기록병, 유해발굴감식병 등이 새로 생겨났다.
해군은 바둑병 외에 태권도와 수영·카누·조정·요트 등 스포츠 분야에서 활약했던 선수들을 선발하고 있다. 전국 대회 3위 이상이거나 대한축구·조정·카누협회에 등록했거나 경력이 있는 선수들은 해군사관학교 등 교육기관에서 조교로 복무한다. 연예인 홍보단도 운영하고 있다. 가수 김건모, 개그맨 김기리 등이 해군 홍보단 출신이다.
공군은 이 분야에서 가장 발 빠르게 대응하고 있다. 장교 중심으로 운영되는 공군 특성상 병사들은 상대적으로 다양한 활동이 가능하다. 공군은 비보이(B-BOY) 활동 경력자 8명이 현재 B-BOY 동아리 지도병으로 활동 중이고, 김영훈(병장)·안하림(상병) 등 국제마술대회에서 1위를 했던 마술사들은 연기자 조인성처럼 공군 군악대에서 복무하고 있다. 스타크래프트 등 온라인 게임이 한창 유행하던 2007년 임요환 등 프로게이머들이 군복무를 하면서도 활동할 수 있도록 e스포츠팀인 ‘공군 에이스(ACE)’를 운영하기도 했다. 이들은 세계 최초 군 프로게임단으로 기네스북에 등재(2009년 4월)됐을 뿐 아니라 272경기에 출전해 우수한 성적을 거뒀다. 하지만 2012년 4월 승부 조작, 게임사와의 갈등 등 e스포츠에 대한 인식이 악화되며 팀을 해체했다.
정용수·유성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