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투표 금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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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푸른 하늘 아래 「아크로폴리스」의 언덕으로 모여드는 성년 남자를 자주 볼 수 있었다고 「아테네」의 입법권을 가진 「민회」가 있는 날이다. 전체 시민으로 구성된 이 「민회」는 적어도 1년에 10회, 때로는 10일이 멀다고 열리기도 하였다.
가끔 그들의 손에는 도편이 쥐어지기도 하였다. 그 도편에는 참주가 되려고 야심을 품은 정치가에 대한 추방 여부가 표시되어 있었다. 이 표결에 따라 10년간의 추방을 면치 못한 정치가도 적지 않았다. 이것이 자랑스러운 「도편 추방제」이다. 2천5백년전이라 그런지 부정투표가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이것은 직접민주제를 원칙으로, 삼던 고대 희랍에 있었던 일종의 국민투표였다. 그러나 근대국가, 특히 간접 민주제인 의회 민주제 하에서는 그 의회제의 원칙에 대한 보완적인 제도로 어떤 특정한 사항에 관한 통치 의사의 결정 과정에 참여하려는 국민의 일반투표가 되었다.
이 제도는 근세에 들어와서는 3색기가 회오리치던 「프랑스」 혁명 당시에 자주 있었다. 혁명의 절정기인 l793년 「자코벵」당의 헌법은 찬성1백80만, 반대2천6백10표였다. 기권율은 40%.
그 2년 후에 있었던 집정 정부 헌법은 재산에 의한 제한선거였는데 찬성 91만, 반대 4만1천 표였다. 기권율은 자그마치 65%.
「이집트」원정 중 급거 귀국한 「나폴레옹」은 1799년 11월,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다. 『나는 비상 권력을 나에게 위임한 위험이 가시면 바로 이 권력을 포기하겠노라고 여러분에게 선언한다.』는 말과 함께 이듬해 정월에 국민투표를 실시하였다. 찬성3백1만, 반대1천5백62표, 찬성2천명에 반대1명 꼴이 된다. 이를 「나폴레옹」식으로 기권도 찬성으로 간주하면 그 수는 5백만 표로 늘어난다.
그는 황제에 취임할 때도 국민투표로 지지를 구하였다. 그러나 그의 정치는 「프랑스」의 혁명 정신인 자유와는 아무 상관도 없었다. 그는 그에게 충성을 맹서한 관료를 거느리고 국민을 지배하였다고 사가는 입을 모아 말하고 있다.
집정 정부가 서자 사실상 끝난 「프랑스」 혁명은 「나폴레옹」의 집권으로 명목조차도 잃게 되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자유·평등·우애란 이상을 나타내던 3색기는 어느덧 침략의 상징으로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시대는 바뀌어 「위대한 프랑스」를 표방했던 희대의 애국자 「드골」의 마지막 국민투표에서 「프랑스」 국민은 「농」으로 보답하였다. 위대한 국민은 위대한 노 대통령의 마지막 노고를 아껴 주었다.
5·16후 우리도 이미 세 번이나 국민투표를 겪었다. 네번째 국민투표를 실시하게 된 지금 이제는 제법 익숙한 투표를 해야 되겠다는 생각뿐이다. 국민의 참뜻이 최대로 반영되는 투표가 되도록 정부가 앞강 서 주기를 바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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