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다운 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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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이 시대는 인간의 말과 문명의 소음이 지배하고 있는 것 같다. 인류 역사상 지금처럼 갖가지 말들이 범람하던 시대는 일찌기 없었다. 말이란 사람의 마음이 소리로 표현되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마음속에 있는 생각은 반드시 말이 되어 나타난다.
「말」에는 보통 우리가 「말」이라 하는 음성으로서의 말이 있다. 감정의 변화에 따라 표정은 각기 다르게 떠오른다. 이것도 역시 「말」의 한가지에 속한다. 그것은 「말」이란 궁극적으로 하나의 동작을 이끌어 오는 원인이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침묵도 말의 일종이 된다. 좀 역설적인 것 같지만 침묵은 「말」이 나오는 뿌리인 것만은 틀림이 없다. 그러므로 침묵은 말의 뿌리, 다시 말하면 「말 가운데 말」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동작 자체도 「말」, 즉 언어권에 속하고 있다. 우리는 입을 가지고 있다. 입이 있는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많겠지만 다음의 두 가지가 그 대표적인 것 같다. 그것은 먹기 위한 것과 말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먹는다는 것은 자기의 생명을 확대시켜 가고 지탱해 가는데 필요 불가결한 것이다.
「말」은 먹는다는 인간의 기본 행위의 표출이다. 먹는다는 것이 인간의 기본 행위라면 말한다는 것도 인간의 기본 행위이다. 권리라는 말이 있다.
어떤 생명체에 선천적으로 괴어 있는 행사권이 그것이다. 「말」은 인간의 권리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권리의 하나다.
인간의 말은 그것이 진실에서 나온 것이라면 어떤 말이든 간에 모두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말을 귀담아 듣는다면 그 사람의 진심 어린 마음과 내 마음의 교류가 시작된다. 이것을 대화라고 한다. 대화는 아집과 독선에서 해방시켜 주며 진리에 이르는 길을 열어 준다. 「말」은 곧 생명의 소리화 현상이다. 얘기가 좀 비약되는 것 같지만 내가 태어난 것도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부모들을 결합시켜 준 것이 「말」이다.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 각기 다른 두 단체가 공통점을 찾기 위하여 눈짓이건, 손짓이건 여하튼 어떤 식의 표현이 있었을 것이다. 이것이 「말」이며 이 「말」이 「나」라는 열매를 맺은 것이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은 「말」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에게서 「말」에 대한 개념을 뽑아 버린다면 그는 어떠한 사고도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인간에게서 「말」을 말살하는 것은 사고를 빼앗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사고를 빼앗긴 인간은 인간이 아니라 먹는 기계일 뿐이다.
『인간의 말은 모두 생명의 뿌리에서 싹터 나온 가지와 잎이다. 왜냐하면 「말」그 자체가 곧 생존이기 때문이다(일절중생종종언어개체불이여래법륜하이고언음실상즉법론고-화엄경·여래출현품). 그러나 말이라고 해서 다 믿을 것은 못된다. 「말」 가운데에도 「말 같지 않은 말」과 「말다운 말」이 있다.
전자는 남을 속이기 위해서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함부로 지껄여 대는 속임수인 것이다. 후자는 마음이 그 말속에 깃 들어 있는 진실이다. 「말」이 중요하듯 사이비 말과 진짜 말을 가려낼 줄 아는 것도 중요하다. 말에 속아서는 안 된다.
「말」이 주는 피해는 원자탄보다도 크기 때문이다.
종교의 사명은 많지만 어느 시대·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공통되는 하나가 있다. 말다운 말(인간)이 자기를 부르면, 그것이 절실한 생명의 외침이라면, 설사 죽음의 길이라도 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이곳은 어떠한가. 어설픈 아첨이나 분별없는 용기(?) 뿐이다.
종교의 목적이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조화에 있다면, 인간관계의 기본인 「말다운 말」을 외면해 버리는 그런 자세에서 잠깨지 않는 한 멸시를 벗어날 길이 없을 것이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말이 무엇이며, 그들은 무엇을 이야기 하고자 하며, 또 인간 관계의 집합인 이 역사에 대하여 무엇을 기여하느냐 하는 문제에 부닥쳐 가며 함께 고민하지 않는다면 이곳은 이 시대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내던져진 저주의 집단이 될 것이다. 【석지현 <소림사 승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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