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용학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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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10년 전이었을까. 어느 「세미나」에서 현실참여를 주제로 학자와 문인들이 토론을 열었을 때다. 어느 문단의 중진이 장내를 향해 이렇게 쏘아댔다.
반체제적이라야 참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참여에는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는 어용이라 지탄받고, 또 한쪽은 양심적 학자로 여겨지느냐. 이보다 더 무서운 폭력이 어디 있겠느냐. 이 발언에 다른 「세미나」참가자들은 한결같이 침묵을 지켰던 것으로 기억된다. 동조의 뜻에서는 물론 아니었다.
그 후 그분은 「참여」에 발벗고 나섰다. 그 「세미나」에 참석했던 학자들 중에도 그의 뒤를 따른 사람들이 서넛 생겼다.
지난 10년 동안에 「참여」의 둑이 크게 달라진 모양이다. 그러나 「어용」이라는 꼬리는 끝내 사라지지도 않고 있다. 아무리 세월이 바뀌어져도 「어용학자」의 뜻이 바뀌어지는 것은 아니다.
언젠가 「프리츠·파펜하임」이 학자의 현실참여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하버드」대학의 교수가 몇 명이나 「워싱턴」에 들어갔느냐는 게 문제되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정책결정자의 사고에 그들의 「비전」을 얼마나 주입시키는데 성공했느냐는 사실이다.』
분명, 정부를 돕는다고 어용학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정부를 비판하는 것이 현실참여의 유일한 방법도 아니다.
그러나…. 그러나 여기에 문제가 있다. 「파펜하임」의 말을 다시 들어보자.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이 당초에 참여하게 된 계기가 됐던 사상을 포기하고 지배적 노력의 「패턴」에 적응하게 되었느냐 아니냐는 데 있다.
한마디로 곡학아세를 했느냐 안했느냐에 어용이냐 아니냐의 갈림길이 있다는 것이다. 누구의 말이 아니라도 정부평가 교수들을 모두 어용학자라고는 볼 수 없다. 우선 그렇게 본다면 어용학자의 수가 너무 많아져 야단일 것이다.
「한스·모겐소」가 격동기의 지성의 네 가지 대응의 자세를 말한 적이 있다.
ⓛ「아르키메데스」처럼 상아탑 속에 잠긴다. ②권력과 예언자적 대결을 한다. ⑨전문가적 조언을 한다. ④굴복해버린다.
이 중에서 ④는 완전히 어용학자에 속하게 된다. 그리고 ③의 경우도 전문가적 조언의 테두리를 한발짝이라도 벗어나면 「어용」의 지탄을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실제로 전문가적 조언에는 곡학의 위험과 유혹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것을 이겨내기란 여간 힘드는 게 아니다.
더욱이 우리에게는 「전문가적 조언」에서 「사대부」의 「이미지」를 찾으려는 반갑지 않는 역사가 있다. 그리고 「사대부」의 성실을 「지적 배신」이라 보게 되는 오늘의 현실이 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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