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의 탄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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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어느 특정 분야의 전문 용어가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그 본뜻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쓰이고 있는 예는 허다하다.
「비극」이란 말도 그 중의 하나다.
간혹 신문 사회면에 주먹만한 활자로 오르내릴 때의「비극」이란 말은 대개「비참」이라든가 비애라든가 하는 뜻으로 쓰이지만 연극에서의「비극」이란 오히려 그 반대의 뜻에 가깝다는 얘기다. 비극이란 인간생활의 비참한 얘기나 패배를 그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패배를 딛고 일어선 인간의 승리를 강하게 암시해 주는 얘기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슬픈 사랑의 종말은 우리에게 슬픔과 실망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사랑의 숭고함과 위대함, 그리고 영원성을 확인시켜주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선왕의 살해자가 곧 자기자신이며 자기를 낳아준 어머니와 동침하여「형제인 동시에 자신」인 씨를 남은 것을 깨닫는 순간「외디푸스」는 자기의 두 눈을 빼내는 육체적 형벌을 가하고 끝없는 유랑의 길을 떠날 때 오히려 우리는 공포와 연민을 넘어서 가슴 쳐 밀려오는 인간의 존엄성과 영원성, 그리고 승리감으로 인해 감정의 순화를 받지 않는가? 따라서 비극이란 긍정적 가치관을 배경으로만 존재하며 크게는 관객이라는 한시대의 단위체가 연극 속에서 자신을 확인, 발견하는 신화를 전제로 가능하다.
비극이 존재하지 않는 시대는 불행한 시대이다. 왜냐하면 거기엔 신화의 상실과 인간의 상실만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대에는 비극적 체험의「카티르시스」는 이미 없고 오직「슬픈 얘기」만이 있을 뿐이다. 내가 살고있는 시대의「비극의 부재」를 확인할 때 우리는 새삼 절망을 맛보게 된다.
이미 신을 믿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이웃을, 그리고 나 자신을 신뢰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기대의 싹이 트고 긍정적인 가치관도 이룩될 것이 아닌가.「슬픈 얘기」들만이「비극」이란 탈을. 쓰고 신문지상을 어지럽히고 있다.
그러나 인간상실을 회복해보려는 우리의 몸부림 속에는 아직 일말의 희망적 기미는 있다. 그리고 그것은 때로 아주 사소한 것이 점화되어 무서운 힘으로 터져 나가는 잠재력이기도 하다. 이것은 하나의 인간에 있어서나 어떤 단위체에 있어서나 마찬가지라고 생각된다.
아직 우리는 팔월 한가윗날 이웃과 떡을 나누어 먹는 사랑을 간직하고 있다. 전남지방 수해도 외면할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내 집의 난리였다.
비극이 다시 탄생할 때 그것은 풍요의 세월이며 이는 잃어버린 인간의 회복, 그리고 겨레의 신화를 찾는 순간이다.
말로 표현하기는 어려우나 분명하고도 면면하게 흐르는 우리들의 피 속에 점화하고 민족적 자아를 발견하여 유지할 때 이 땅에도 비극의 탄생이 가능할 것이다.【유인형<연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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