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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증·인감만 위조하면 주인 몰래 집 팔 수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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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서울 시내의 한 부동산중개업소에서 공인중개사가 한국공인중개사협회의 거래계약서 작성 프로그램인 ‘탱크21’을 통해 사무실 임대차 계약서를 작성하고 있다. [황정일 기자]

한국공인중개사협회가 부동산 거래계약서 데이터베이스(DB) 서버를 운영하기 시작한 것은 2004년부터다. 당시 협회는 부동산거래의 정보화라는 취지로 거래계약서 작성 프로그램인 ‘탱크21’을 만들어 회원 부동산중개업소에 무료로 배포했다. 중개업소가 탱크21을 통해 계약서를 쓰면 자동으로 협회 DB 서버에 계약서가 저장되는 형식이다. 1월 말 현재 탱크21 프로그램을 이용 중인 중개업소는 전체(8만1000여 곳)의 76%인 6만2195곳에 이른다. 탱크21 프로그램을 쓰지 않는 나머지 중개업소들은 사설 프로그램이나 수기로 작성해 보관한다.

 국내에서 한 해 이뤄지는 부동산 거래(주택 매매·임대차, 토지 매매·임대차 등)는 연 평균 70만 건. 해킹당한 중개사협회 탱크21을 쓰는 중개업소가 전체의 76%에 달하니, 매년 56만여 건의 거래계약서가 탱크21 DB 서버에 쌓인 셈이다. 이렇게 지난 10년간 모인 부동산계약서 594만8303건이 적어도 두 달간 무방비로 노출된 셈이다.

 만약 거래계약서가 유출됐다면 후유증은 심각하다. 부동산 거래계약서에는 매도자와 매수자의 주민등록번호·주소·전화번호 같은 신상정보는 물론 해당 부동산의 위치·가격·대출금 정보까지 상세히 담겨 있다. 이 정보가 악용되면 2차, 3차 피해가 발생할 수 있을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 우선 주민등록증이나 인감을 위조하면 각종 사기 등의 범죄 행위에 이용될 수 있다. 주인 모르게 해당 부동산을 파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다.

 예컨대 범행 대상인 주택에 전세를 든 뒤 부동산중개업소에 집을 매물로 내놓으면 의심하기가 쉽지 않다. 경기도 성남시 판교동 판교로뎀공인 임좌배 사장은 “실제로 해당 집에 살고 있고, 위조한 주민등록증과 인감이 있다면 의심할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해당 부동산을 담보로 대출을 받을 수도 있다. 신한PB 서초센터 이남수 PB팀장은 “서류나 자격 심사가 비교적 까다롭지 않은 제 2금융권에서는 매매계약서와 신분증·인감이 있으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부동산 거래내역 등을 한눈에 볼 수 있어 특정 이익집단에 흘러들면 정치적 수단으로 쓰일 가능성도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지난 정부에서 이슈가 됐던 이명박 전 대통령의 서울 강남구 수서동 사저 부지 논란도 발단은 부동산중개업소에서 유출된 토지매매 계약서였다. 익명을 요구한 한 국회의원 보좌관은 “네거티브 선거운동에 쓰이면 파장이 클 것”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중요한 정보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본지 취재 결과 협회의 보안 의식은 수준 이하였다. DB 서버 관리를 비롯한 정보통신 분야 직원은 한 명이다. 또 보안 예산은 연간 864만원(웹 방화벽 비용)으로, 협회 1년 예산(약 250억 원)의 0.03%에 불과했다.

 익명을 요구한 협회의 한 이사는 “그나마 직원 한 명도 보안 전문가라기보다는 인터넷 관리 직원”이라고 했다. 사실상 부동산 거래계약서를 인터넷 공간 속에 그대로 방치해 둔 셈이다. 협회 내부에선 해킹이 이번이 처음이 아닐 것이라는 추측이 나온다. 이미 4년 전부터 해킹이 의심되는 이상 징후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2010년 8월의 경우 협회 홈페이지 게시판에는 거래계약서 목록으로 보이는 파일이 노출됐다는 글이 올라왔다. 또 지난해 9월부터 탱크21 프로그램이 갑자기 멈추는 오류가 자주 발생했다는 게 회원 중개업소들의 설명이다.

 그런데도 당시 협회 측은 “9월 2일 오후 2~4시 탱크21 접속자 접속 폭주로 DB 서버 장애가 발생했다”고 고지하는 데 그쳤다. 하지만 지난해 9월은 주택 경기 침체 영향으로 부동산 거래가 특별히 많지 않았다. 실제로 서울부동산정보광장에 따르면 지난해 9월 서울 아파트 계약 건수는 4211건으로 전달(2791건)보다 늘긴 했지만 월평균 수준이었다. 탱크21에 접속 폭주가 걸릴 일이 없었다는 얘기다. 권대중 명지대 부동산대학원 교수는 “부동산 거래는 지방세, 국세와도 관련이 있는 문제”라며 “이 같은 중요 정보를 정부 감시도 없이 협회가 운용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지적했다.

황정일·최현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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