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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닉슨」 전 대통령에 대한 사면 특명은 미국에서 두 갈래의 반응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는 동정적인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반발하는 입장이다. 우선 백악관 대변인은 이에 불만을 표시하고 스스로 사임해 버렸다. 상·하원의 민주당 의원들도 적지 않게 술렁거리는 모양이다.
그러나 불만의 바탕은 「닉슨」에 대한 냉혹한 감정에만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법의 평등』을 주장하는 이들은 「닉슨」 보다 월남전에의 병역 기피자들을 먼저 사면해야 마땅하다고 말한다. 문제는 두가지의 사면이 동시에 거론되다가 그 선후가 뒤바뀐 것 같은 인상 때문에 이런 파문이 일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동정파나 불만파들의 마음을 꿰뚫는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법에 의한 처벌』도 『법에 의한 사면』도 모두 평등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선의의 법률은 반드시 처벌만을 목적으로 하고 있지는 않다. 그것은 한 수단에 불과하며 진정한 목적은 그것을 지키게 하는데에 있다.
도덕적인 기반을 어느 사회에서나 이상으로 삼고 있다. 따라서 법률도 그런 기초위에서 운영된다. 어떤 법률에도 정상이 뛰따르는 것은 그런 「모럴」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회에 사면과 같은 제도가 있는것도 결국 인간의 정신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동양엔 이런 고사가 있다.
『삼국지』에 나오는 「칠종칠금」의 이야기. 촉한의 제갈량이 남만을 쳐들어 갔다. 맹획이 괴롭히는 것을 참다 못해 한일이었다. 제갈량은 결국 그 맹획을 붙잡아다가 강복을 요구했다. 그러나 맹획은 이를 끝내 거부했다. 제갈공명은 으름장을 놓고 그를 그대로 풀어 주었다.
그러나 남만은 계속 촉한을 괴롭혔다. 공명은 무려 일곱 차례나 맹획이란 자를 붙잡아다가 거듭 강복을 요구했지만 끝내 거절당했다. 그래도 다시 놓아주었다.
공명의 부하들은 물어보았다. 왜 자꾸 놓아주는지, 그뜻을 알수가 없었다. 공명은 비로소 말했다. 『맹호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를 감심시키는 쪽이 그의 강복을 받는편보다는 낫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 않고는 언제 남만의 이반자들이 고개를 들지 모를 일이라는 것이다. 일곱번째 풀려난 맹획은 비로소 감심하고 만다.
서양의 고사도 있다. 성서에 나오는 이야기다. 구제자 중의 하나인 「베드로」는 예수를 세번이나 배반했다. 그때마다 그는 용서를 받았다. 언젠가 「베드로」는 예수에게 물어보았다. 『형제가 죄를 범하면 몇번이나 용서해 줄까요? 일곱 번이면 충분합니까?』예수는 이렇게 대답했다. 『일곱번이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용서해 주라.』
무릇 신앙의 경지가 아니라도, 「사람」과 「덕망」은 넘칠수록 좋다. 「포드」 대통령의 정치적 「제스처」는 그만 두고라도, 역사의 유구한 흐름을 보면 그 바탕은 관용과 화해의 추구에 있다. 『한눈을 감을 줄 모르는 자는 다스릴 줄도 모르는 자이다』-. 서양의 이런 격언은 음미해 볼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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