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외교관계의 단계 「우호」에서 「단교」까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8·15 저격사건」 뒤처리를 둘러싸고 한·일 관계는 65년 국교정상화 후 최악의 사태를 맞고있다. 한·일 관계의 궤도이탈은 『한·일 무역회담의 개최중지』, 『단교도 할 각오를 하라』는 국회 외무위의 대정부 촉구, 박정희 대통령의 대일 경고로까지 확대되어 조만간 「중대한 국면」으로 발전될 기미조차 나타나고 있다. 박 대통령이 지난달 30일 이례적으로 「우시로꾸」 대사를 불러 『일본측이 「8·15 사건」 처리에 우방으로서 납득할만한 필요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경우 일본과의 우호관계를 지속하기 어렵다』고 말한 것은 앞으로 올 사태에 대한 경고이며 강경 입장의 행동표시다.
정부가 일본에 대해 요구했거나 요구할 내용은 ①저격사건에 대한 정치적·도의적·국제법적 책임의 시인 ②사건의 배후와 공범자의 철저 수사 ③공범의 한국 인도 ④이번 사건을 배후 조종한 반한 활동의 본산인 「조총련」 및 「한청」의 불법화 내지는 활동의 규제 ⑤「기무라」외상 발언의 수정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이 가운데 어떤 것도 요구대로 듣기 어렵다는 것이 일본측 태도다.
자민당 정권으로선 사회·공산 등 야당과 언론·조총련의 공작 압력 등으로 정권을 내놓을 각오가 되어있지 않는 한 앞으로도 한국정부가 만족할만한 조치를 취하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이다.
국제법상 국가의 국제책임을 해제하는 방법은 ▲원상회복 ▲손해배상 ▲진사 ▲책임자의 처벌 ▲장래에 대한 보상 등 여러 가지다. 그리고 피해를 준 국가가 끝내 국제책임을 부인하고 책임을 해제하려는 성의를 나타내지 않을 때 피해국은 불만과 항의의 표시로 주재대사를 소환하거나 한 걸음 더 나아가 외교동결 또는 국교단절의 조치를 취하는 것이 상례다.
지금의 한·일 관계는 일본이 「8·15 저격사건」에 대해 국제책임을 인정하지 않아 한국은 일본의 국제책임을 묻고 이에 대한 시정조치를 요구하는 단계라고 볼 수 있다. 국가는 국제범죄의 사전 예방을 해야할 「상당주의의 의무」 원칙과 국가기관의 과실책임을 인정하는 것의 국제법상 통설이라는 근거에서 우방으로서의 정치적 차원을 떠나서라도 일본이 책임은 면치 못한다고 보는 것이 우리정부의 입장이다.
정부는 지난 5월28일 반한 활동을 격화시키고 있는 조총련을 규제해 줄 것을 정식 외교문서로 일본정부에 촉구했었기 때문에 일본정부는 범죄행위의 사전예방을 위한 「상당주의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
그동안 정부는 여러 차례 일본에 대해 성의를 촉구했으나 납득할만한 반응이 없는 상황이어서 다단계 대응조치를 마련하고 있는 것 같다.
그 조치가 주일대사의 소환·외교동결·국교단절의 셋 중 어느 것인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대사소환은 수교국에 대한 강력한 항의표시로서 그 경우 공사나 참사관이 대사 대리직을 수행하게되며 외교관계는 계속되나 우호국으로서의 분위기는 상실되기 마련이다.
한국은 북괴와의 외교관계 수립에 항의하여 지난 72년 주 「칠레」대사를, 73년엔 주 「스웨덴」대사를 장기 소환한 일이 있다.
◇외교동결은 대사관원을 전원 또는 부분 철수시킨 후에 외교관계를 정지시키는 행위로서 사실상 국교단절을 선언하는 것만을 유보한 상태.
외교동결 아래서도 영사업무는 계속될 수 있고 민간경제 관계도 유지될 수는 있다.
◇국교가 단절되면 우호관계는 물론 공식적인 외교관계의 종식을 가져온다.
상황과 나라에 따라 영사업무나 무역관계는 계속될 수 있다. 그러나 최악의 경우엔 주재 신문특파원의 추방 또는 철수, 무역관계의 단절까지도 가져올 수 있다.
지난 64년과 65년 「할슈타인」 원칙을 적용, 「모리타니」 「브라자빌·콩고」와 국교를 단절한 것이 한국과 다른 나라와의 단교사례.
일본과 대만과의 단교는 지난 72년9월 일본이 중공과 수교한 직후 대만단교가 선언되어 서로 대사관을 절수시키고 곧이어 항공기의 취항도 단절하는 사태로 발전했다.
다만 정식 외교관 아닌 관원을 책임자로 한 「연락 사무소」를 설치, 실질적인 영사업무를 맡도록 했고 경제·문화관계는 계속시켰다(일부 정부간 협정은 민간협정으로 대치).
대만주재 일본특파원의 철수는 「대만은 중공의 일부」라는 일·중 공동성명 규정에 따라 북경에 특파원을 파견하기 위한 일본신문사 측의 자율행동 때문에 이루어 졌다.
이 당시 일본은 대만에 총 40억「달러」를 투자해놓고 있었고 대만의 대일 무역량은 전체의 30%를 차지하고있는 상태였다.
한·일 관계를 돌아보면 지난 55년8월, 그리고 59년6월 두 차례에 걸쳐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대일 통상 중단조치를 취했었다.
55년엔 일본이 중공과 무역협정을 맺자 민주우방에 대한 배신행위를 지적, 맹성을 촉구하기 위해서였으며 59년엔 일본정부의 재일 교포 북송에 항의해서 취해졌던 것으로 4∼5개월만에 해제했다.
한·일 외교관계에 결정적 균열이 온다하더라도 과거처럼 통상중단은 생각하기 어렵고, 차관·투자는 동결될 것이 틀림없다. <이제훈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