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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성품…효성도 지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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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옥천=이민종·박영수 기자】목련처럼 우아한 자태의 고 육영수 여사는 소녀 시절도 평소의 그의 성격대로 고요하고 겸허했다.
뜻밖에 전해진 육 여사의 비보에 그의 향리인 옥천의 마을 사람들은 고인을 이렇듯 회억하며 모두 슬픔에 잠겨 있었다. 고 육 여사와 소녀 시절을 함께 지낸 고인의 동창들은 슬픔을 씹으며 고인의 어린 시절을 되돌아 본다.
육 여사와 죽향 국민교 27회 동기 동창생인 이삼분 여인(52)은 세 살 아래인 육 여사와 딱딱한 나무의자 맨 앞줄에 나란히 앉아 공부하던 때가 눈에 선하다면서 어렸을 때 학교 생활을 더듬었다.
육 여사는 8세에 국민학교에 입학, 급우들이 모두 육 여사보다 3∼5세가 위였다.
1학년은 단 1학급으로 한 반 학생이 45명, 남자가 27명, 여자가 18명이었다.
육 여사는 생가에서 1·2km 떨어진 학교에 도보로 통학하며 교내에서는 항상 나이가 가장 어려 귀염을 독차지했다는 것.
소녀 시절의 육 여사는 급우얘기를 할 때는 『모두가 자신보다 낫다』고 겸허한 자세였 다.
당시 육 여사는 학교 생활에서 활동적인 면은 적었고 집에서도 밖에 나와 노는 일이 없어 이웃에서 얼굴보기가 힘들었다.
육 여사의 학교성적은 언제나 뛰어났으며 모든 과목들을 골고루 좋아했다.
육 여사는 학교에. 다닐 때 언제나 검정치마에 흰 저고리를 입었으며 검정 고무신을 즐겨 신었다
학교를 졸업할 즈음 나이 많은 동창생들이 시집가는 것으로 화제를 모으면 육 여사는 사범학교로 진학, 교육자가 되어 고향에 와서 후배들을 가르치고 싶다고 말했다
그래서 교사 생활을 고향 학교에서 했다.
육 여사의 생가는 1백년이나 자란 네 그루의 은행나무와 아름드리 나송 두 그루에 둘러싸여 있다.
이런 정서 깊은 환경 속에서 1925년 육종관씨 둘째 딸로 태어났다.
뜰 연못에서 풍기는 그윽한 연꽃 향기 속에서 곱게 자란 육 여사는 어릴 때부터 손꼽히는 효녀로 유명했다. 죽향 국민학교에 입학 후 육 여사는 등·하교 때 항상 부모님께 큰절을 했다.
1946년∼48년까지 옥천 여중(당시 삼양 국민교 교사 이용) 수예 교사이던 육 여사는 울 안에 핀 백목련과 분홍 진달래꽃을 꺾어들고 등교, 제자들에게 꽃의 순결성처럼 곱게 자라라고 이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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