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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제4장 관동지방의 한적 문화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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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중부 일본의 관문이라 할 신호로부터 동경에 이르는 육로는 예나 지금이나「동해도」라 불리어 일본에서도 가장 폭주하는 간선도로이다. 지금은 일본이 세계에 자랑하는 쾌속호화열차 동해도신간선(신대판∼동경)이 시속 2백㎞의 맹렬한「스피드」로 달려 단 3시간15분만에 연결해주는 가까운 거리이지만, 옛날에는 가장 빠른 파발 말을 타고서도 4∼5일이 넘어 걸리는 구간이었다.

<통신사 오가던 길 동해도>
한국잇수로 쳐서 약 1천5백리인 이 길은 도중 일본의 옛 수도이던 대판·경도를 비롯하여 명고옥·정강·소전원·횡빈 등 중요 도시를 거쳐 강호(지금의 동경)에 이르는 혈맥이었다. 그래서 고내로 이 길목을 오간 인마·문물의 교류는 곧 일본역사의 고동이었다고 해서 지나친 말은 아니다. 그리고 근세 이후 한·일 양국이 정식외교관계를 맺게 되면서부터는 이 길이 또한 양국외교 사신들의 통로였던 것이다. 당연히 이 길목 도처에는 지금도 그 때 한국의 외교사절들이 내왕하면서 남긴「에피소드」들이 숱하게 깔려있다. 정강근처「시미즈」(청수)항의 포구를 내려다보는 언덕에 자리잡고있는 청견사도 그 중의 하나이다.
「동해 제1거찰」이라는 칭호를 가진 청견사는 지금도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일본국도 제1호선(구동해도)을 눈 아래에 굽어보면서 부사산의 줄기를 탄 언덕에 터잡은 오랜 절간이다. 이 길목은 예나 지금이나 동해도를 여행하는 사람들이 동경(옛 강호)에 이르기 전에 반드시 거쳐야할 최후의 난로「하꼬네재」로 들어가는 초입이기도하다.
등뒤로 일본 제1의 명산 부사산의 눈 덮인 영봉이 바로 접근해 있고, 발 아래로는 이른바『하고로모 선녀전설』로 이름난「미호노마쓰바라」너머 춤추며 반짝거리는 태평양 푸른 물결을 바라볼 수 있는 절경-. 이런 절경 속에 자리잡은 청견사는 덕천시대 전후 2백여년에 걸쳐 당시의 조선조정이 일본에 보낸 외교사절(회답사·통신사 등)의 객관이었던 것이다.

<이인배와 김인겸의 한시>
청견사에는 지금도 이들 한국의 사신들이 남긴 수많은 서화들을 고스란히 사보로 간직해 내려오고 있다. 기자가 이곳을 찾아갔을 때 마침 이 절간은 대대적인 중수공사가 한창이었으나 주직은 북새통속에서도 그 원본들을 보여주고 사진으로 복사하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탑용부용계 누락일월파
어주연외반 증절우중과
만지신매호 참천고목다
수방제물색 기나객수하
(연꽃에서 솟아오르는 듯한 탑. 물결치는 곳으로 열려있는 누. 돌아오는 고기잡이배 멀리 아른거리니 빗속에서 지남을 알리는구나. 가득히 피어오른 매화의 꽃봉오리, 하늘에 닿을 듯한 울창한 고목들. 이국에서 시제로 읊을 운치를 물색하노라니 어찌 객수가 없겠는가.)
이것은 영조39년(1763) 11번째 통신사로 간 부사 이인배가 남긴 시요, 그 친필인 것이다.
또 이 때 정사 조협을 수행했던 문인 김인겸(호 퇴석)은 귀국 후『일동장유가』라는 기행가사를 남겨 국문학사상으로도 높이 평가되는 사람이지만, 청견사에는 그 주직 관렬상인 (당시)에게 작별을 아쉬워하는 글을 써주었던 모양이다. 옮겨보면-
하처승고월하간
하삼내자교운간
연상시화유금야
명일초초격해상
(달빛아래 문 두드리는 스님은 어디서 왔는지, 놀 속에 장삼보이니 구름 속에서 오셨는가. 자리를 마주하여 시화를 즐김도 오늘밤이 마지막, 내일이면 멀리멀리 바다건너로 작별하게되었네.)

<청견사엔 정·부사만이 유숙>
청견사에 지금 남아있는 역대사신들의 시구는 이것 말고도 꽤 많다. 모두 50편을 사진에 담았다. 주지스님의 말을 들으면 역대통신사 일행의 왕복시 이 절 객전에 묵은 사람은 오직 정·부사와 종사관등 이를테면 수석 대표급의 사람들뿐이었고, 나머지 수행원들은 모두가 근처의「에지리」숙·유비숙 등(지금의 청수항 근처)에 분산해서 유숙했으므로 그들이 남긴 필묵·서화들도 또한 적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 당시 통신사 일행의 여로는 뱃길로 대마도를 거쳐 근기지방의「나니와」(난파=지금의 태판), 「사까이」(계) 등지에서 상륙, 대열을 가다듬고 일로 동해도를 누비면서 강호까지 내왕하는 것이었는데 이 때 연도일대는 온통 축제기분에 들떠 일본전국으로부터 이들에게 접근하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고 한·일 양국사에 기록돼있다.
한국에서 파견한 통신사 일행은 외교사절로서의 위용을 자랑하기 위해 국내에서도 가장 뛰어난 젊은 인재들을 정·부사, 종사관과 함께 수행하는 수원으로 삼았을 뿐 아니라 5백명의 일행 중에는 그림 그리기·활쏘기·곡마 타기 등 각방면으로 다재 다능한 인재들을 뽑아서 대동케 했던 것이므로 이들이 유숙하는 곳마다에는 혹은 묵필·서학, 혹은 희귀한 전적 등을 얻어 갖고 필답으로 학문을 배우려는 일인들이 운집하여 그야말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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