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 Report] 콜센터의 한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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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모든 금융사의 전화영업이 금지된 지난 3일 서울시내 한 콜센터 사무실이 텅 비어 있다. 금융당국은 중단됐던 전화영업을 이르면 다음주 후반부터 순차적으로 허용하기로 했다. [뉴스1]

지난 4일 오후 서울의 한 생명보험사 콜센터. 평소 100여 명이 전화영업을 했지만 이날 자리를 지키고 있는 직원은 예닐곱 명에 불과했다. 금융당국의 전화영업(텔레마케팅) 금지 조치로 직원들이 오전 교육만 받고 퇴근해서다. 남은 이들도 오후 3시 전에 사무실을 떠났다. 텔레마케터 임현숙(44·여)씨는 “14년간 근무하면서 이런 일은 처음”이라며 “내가 일해서 애들 등록금과 학원비를 대왔는데 계속 일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된다”고 말했다.

 금융당국은 4일 당초 3월 말까지 중단하기로 했던 금융회사 전화영업을 3월부터 전면 허용하기로 했다. 보험사는 이르면 다음주 후반부터 기존 고객에게 전화로 상품을 파는 게 허용된다. 당국이 영업제한 조치를 발표한 지 11일 만에 대책이 뒤집혔다.

 그러나 영업이 허용돼도 텔레마케팅(TM) 시장은 크게 위축될 전망이다. 카드사 개인정보 유출로 국민들이 개인정보에 민감해지면서 전화영업에 대한 거부감이 심해졌다. 한 보험업계 관계자는 “지금 텔레마케터가 하루 종일 전화해서 거래에 성공할 확률이 1% 정도인데 당분간 성공률이 그 절반 아래로 떨어질 걸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달 말까진 영업할 수 없는 카드사 콜센터는 상황이 더 어렵다. 전업계 카드사의 외주업체인 서울 중구의 한 콜센터 전문업체는 설 연휴 전부터 전 사원을 대기 조치했다. 관리직 네댓 명만 출근하고 직원 2000여 명은 집에 있다. 이 업체 관계자는 “3월 말에서 2월 말로 영업정지 기간이 줄었다곤 하지만 한 달간 수입이 없으니 당장 생계가 어려운 직원들이 생겼다”고 말했다. 이 회사 직원은 대부분 30~40대 여성들로, 40% 정도가 ‘외벌이’로 가장 역할을 한다. 이벤트 공지, 카드 재발급 등 일반 안내 전화가 대부분이라 월급도 많지 않다. 기본급 100만원에 경력·성과급을 더해 많아야 150만원 선이다. 이 회사 직원 전예은(40·가명)씨는 “여유 있다면 누가 이 일을 하겠나. 이혼한 40대 여성이 경력 없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며 “당장 다음 달이면 끊길 월급 때문에 백화점 알바를 알아보고 있다”고 말했다.

 텔레마케터들은 이번 일을 겪으면서 세상이 텔레마케터를 보는 시각에 놀랐다고 했다. 임현주씨는 “나를 통해 보험에 가입해서 그 가족이 보장받을 수 있다면 좋은 일이라 믿었는데 정부가 우리를 잠재적 범죄자 취급하는 기분”이라고 토로했다. 생면부지 고객에게 좋은 상품을 소개해주고 있다는 자부심이 깨져버렸다. 또 다른 생명보험 텔레마케터 이윤정(39)씨는 “졸지에 불법 고객정보를 다루는 사람으로 보여 속상하다”며 “영업할 때 우리가 볼 수 있는 고객정보는 내부 전용 PC에 뜬 휴대전화 번호와 주민번호 앞자리 정도로 그나마도 정보는 암호화돼 있고 이동식저장장치(USB) 사용은 상상도 못한다”고 말했다.

 카드·보험 텔레마케터는 ‘할당제’로 일을 한다. 그날그날 할당된 고객정보 데이터베이스(DB)를 받아 전화영업을 한다. 업종 또는 상품에 따라 텔레마케터 한 사람당 배당되는 고객정보는 하루 20~200명으로 차이가 있다. 근무시간에 맞춰 하루 종일 고객에게 전화를 걸고 주어진 스크립트(대본)에 맞춰 읽어가며 보험이나 카드 상품을 설명한다. 기본 스크립트를 미처 다 읽기 전에 고객이 전화를 끊어버리기라도 하면 실적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텔레마케터는 ‘감정노동자’이기도 하다. 수화기 너머로 “너 사기꾼이지?”라며 욕지거리를 일삼는 상대방에게도 “고객님, 상품 안내입니다”라고 웃으며 응대해야 한다.

 보험 전화영업의 경우 중간중간 보험내용에 대한 고객 질문과 돌발 상황을 대비해야 하기 때문에 연차가 쌓일수록 대우가 좋아진다. 경력에 따라 월 200만원까지 기본급이 오르고 계약유지에 따른 성과급을 더하면 300만원 넘게 받는 직원도 있다. 반면 대부분의 텔레마케터는 4대 보험 혜택을 못 받는 특수고용직이다.

 금융업계는 정보유출 사태가 앞으로 얼마나 더 전화영업에 영향을 줄지 주시하고 있다. 특히 텔레마케팅 판매가 해마다 10%가량 성장해온 손해보험 업계의 고민이 크다. 한 대형 손해보험사 관계자는 “자동차보험 시장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수수료가 싼 만큼 보험료를 낮출 수 있는 텔레마케팅 영업을 크게 늘려왔다”며 “금융당국의 영업제한으로 확 줄어든 텔레마케팅 실적이 다시 이전 수준으로 회복되는 데 시간이 꽤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초대형 개인정보 유출 사건이 터진 마당에 텔레마케팅 전화에 거부감을 갖는 고객이 늘어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자신의 정보가 어떤 경로로 팔려나가 전화영업에 쓰이고 있는지 고객으로선 알 길이 없어 불안하다. 고객이 안심할 수 있도록 정보 보안대책을 세우는 건 금융당국과 금융사가 해야 할 일이다. 최현자 서울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정부가 ‘보안상 문제가 없다’고 국민을 납득시킨 뒤 전화영업 재개를 허용해야 하는데, 지금은 그런 게 없이 생존권을 이유로 풀어주다 보니 고객신뢰를 회복하기 어렵다”며 “금융사와 정부 모두 기존 문제를 어떻게 보완할지 설명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지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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