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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한식 메이드 by 대기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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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보=박술녀 한복

일식당·중식당·양식당 다 있는데 한식당만 없었더랍니다. 한국의 특급호텔들 얘기입니다. 돈이 안 된다나요. 그런데 웬일인지 돈 안 된다는 한식당 운영에 뛰어드는 대기업과 외식기업이 하나 둘 늘고 있습니다. 덕분에 메뉴는 물론 가격대까지, 골라먹을 수 있는 한식의 폭이 훨씬 다양해졌습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한번 알아볼까요.

신데렐라 된 한식 그 뒤에 대기업 있었네

천덕꾸러기에서 신데렐라로-. 한식 얘기다. 이런저런 이유로 제 대접을 못 받던 한식이 자기 자리를 찾아가고 있다. 일식당이나 프렌치·이탈리안 레스토랑처럼 트렌디하고 한편으론 고급스러운 한식당이 속속 생겨나고 있다. 몇해 전에도 ‘한식 세계화’라는 이름 아래 비슷한 바람이 불었다. 이에 편승해 서울 곳곳에 한식 레스토랑이 생겼났었다. 하지만 일인당 10만원을 상회하는 코스 위주의 최고급 한정식집이라 스스럼없이 찾기엔 부담스러웠다.최근 등장하는 한식당은 비교적 싼 가격과 간편한 메뉴로 트렌드와 럭셔리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고 있다. 이 배경엔 대기업이 있다. 대기업 계열의 외식업체, 그리고 외식전문 기업들이 한식에 새 감각을 입혀 까다로운 대중의 입맛을 충족시키고 있다.

다담의 연꽃 구절판

청담동 스타일 한식집의 탄생

 청담동은 여전히 트렌드를 주도하는 곳이다. 가로수길과 이태원·경리단길 등 이른바 트렌드세터(유행을 주도하는 사람)의 거리라 불릴 수 있는 지역이 많아지긴 했다. 그래도 청담동에 ‘뭔가 새로운 게 생겼다’고 하면 다들 주목한다. 이런 청담동에서 요즘 부쩍 눈에 띄는 게 있다. 바로 한식당이다. 값 비싸고 전부 다 먹기에 부담스런 상다리 부러지는 한정식 집도, 그렇다고 맛만 강조하는 지나치게 소박한 단품 식당도 아닌 전혀 새로운 한식당 말이다.

 이른바 ‘청담동 스타일 한식당’이다. 대표주자는 청담사거리 근처 옛 엠넷빌딩 자리 지하에 2012년에 문을 연 ‘다담’이다. 대규모 관광객이나 결혼식 손님을 받는 인근 성수대교 남단의 ‘삼원가든’만큼 규모가 크지 않다. 하지만 815㎡(247평)에 200석이 넘고 룸도 16개나 된다. 인근 부동산 관계자는 “청담동에 이 정도 규모 가게라면 임대료만 보증금 6억원에 월세 3000만원 수준”이라고 말했다.

다담의 정재덕 총괄셰프.

 이곳에선 고급스럽고 모던한 인테리어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다담 측은 “영업기밀”이라며 밝히길 거부했지만 본디자인 김윤수 대표가 맡아 한국미를 은은하게 살린 인테리어는 한눈에 봐도 상당한 비용이 들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서비스는 호텔급이다. 룸마다 손님이 드나드는 문과 별도로 주방과 통하는 문이 하나 더 있어 다른 한식집보다 덜 번잡스럽다.

 그런데 메뉴를 보면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제법 가격이 비쌀 것만 같은데 이곳 대표 메뉴는 1만~2만원대의 단품 요리다. 3만원을 넘는 건 간장 게장이나 제주 옥돔구이 정도다. 물론 다른 한정식집처럼 점심에 4만원이 넘는 코스 요리도 있고, 고깃집처럼 한우도 팔지만 손님 대부분 한상에 찬까지 깔끔하게 나오는 순두부찌개나 곤드레돌솥밥·묵은지 김치찜·한우 갈비탕 등 단품요리를 먹는다.

 이게 가능한 이유는 대기업, 그러니까 CJ푸드빌이 이곳을 운영하기 때문이다. CJ푸드빌은 이곳을 단순한 식당 하나가 아니라 CJ푸드빌 전체의 연구개발(R&D)센터 역할로 활용하고 있다. CJ푸드빌 마케팅팀 임종욱 과장은 “‘계절밥상’과 ‘비비고’ 등 CJ의 한식 관련 브랜드의 R&D센터를 이곳에서 겸한다”고 말했다. 다달이 손익을 따지는 데서 비교적 자유롭다는 얘기다.

 다담 한곳만이 아니다. 올 들어 매일유업도 청담동 사옥 1층 커피전문점 ‘폴 바셋’ 바로 옆에 다담과 비슷한 콘셉트의 한식당 ‘정’(正)을 열었다. 한식과 일식의 결합을 내세워 점심메뉴에 한식·일식이 섞인 도시락을 선보인다. 메뉴는 다담과 다르지만 식전용 주전부리로 말린 대추나 부각을 내놓거나 이를 사각 그릇에 담는 것에 이르기까지 다담과 비슷한 점이 많다. 기존 한식당에서 볼 수 없던 모던한 인테리어 콘셉트도 그 중 하나다. 이곳 주방은 워커힐·신라호텔 일식당 출신 이정기 셰프가 맡고 있다. 호텔 출신 주방장이지만 가격은 호텔의 절반 수준이다. 깔끔한 호텔식 도시락을 비교적 싼값에 먹을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런가하면 삼원가든의 계열사로, ‘블루밍가든’ 등 7개 레스토랑 브랜드를 갖고 있는 SG다인힐은 2012년 청담동에 신개념 고깃집 ‘투뿔등심’을 내 히트를 쳤다. 최상등급, 이른바 ++(투플러스) 한우 등심을 삼원가든의 6만3000원(130g)보다 싼 3만2000원(150g)에 팔면서 와인 코키지(손님이 가져온 와인에 일정한 값을 받는 것)를 받지 않아 주머니 얇은 젊은층으로부터 큰 인기를 끌었다. 이를 발판으로 지금은 가로수길과 이태원을 비롯해 매장을 6곳으로 늘렸다.

 김민정(38·강남구 신사동)씨는 “전엔 점심 약속을 주로 일식이나 이탈리안 레스토랑으로 잡았는데 요즘은 한식집으로 잡는다”며 “종전의 한정식집은 너무 비싸고 일반 한식집은 지저분하거나 번잡스러워 잘 안 갔는데 요즘은 깔끔하고 별로 비싸지 않은 한식집이 많이 생겨 자주 찾게 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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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표 한식당, 득(得)일까 독(毒)일까

 다담이나 투뿔등심 등은 모두 기존 식당보다 훨씬 고급스럽게, 그러나 가격은 합리적으로 내놨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이런 서비스가 가능한 이유는 자본이 뒷받침되기 때문이다. 돈만 있다고 음식장사를 잘 하는 건 아니지만 임대료 비싼 목 좋은 자리에 공 들인 인테리어, 질 좋은 식자재 등을 솜씨있게 빚어 먹음직한 요리를 만들어내려면 분명 꽤 많은 돈이 들어간다. 한동안 특급호텔에서조차 한식당을 철수시킨 것도 바로 이런 이유다. 한식=싼 음식, 이런 인식이 많은 사람들 머릿속에 들어있는 상황 속에서 비싼 값이 매겨진 호텔 한식당은 도저히 수익을 낼 수 없다고 판단한 거다.

 호텔뿐 아니다. 대기업들도 한동안 한식이 아니라 패밀리 레스토랑에만 눈독을 들여왔다. 1980~90년대에 TGIF와 베니건스를 시작으로 해외 유명 프랜차이즈를 앞장 서 들여온 데 이어 2000년대 중반엔 뷔페를 결합한 고유 브랜드 패밀리 레스토랑인 ‘빕스’(CJ푸드빌)나 샐러드 뷔페 ‘애슐리’(이랜드) 등을 잇따라 내놨다. 신세계푸드는 ‘보노보노’라는 씨푸드 레스토랑을 선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돈 냄새 맡기로는 둘째 가라면 서러울 대기업들이 왜 최근 속속 한식에 손을 대는 걸까. CJ푸드빌이 지난해 판교의 스트리트몰인 아브뉴프랑에 연 한식 뷔페 ‘계절밥상’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이곳은 3개월치 예약이 밀려 있고, 당일 밥을 먹으려면 식사시간이 아니어도 1시간 30분은 족히 기다려야 한다. 한식당이 돈 못 버는 천덕꾸러기이기는커녕 엄청난 히트상품이 된 셈이다. 비결은 대기업식 박리다매다.

 계절밥상을 “자주 찾는다”는 주부 이경선(33·분당 정자동)씨는 “가격은 평일 기준으로 일인당 1만원대로 저렴한데 고추장 삼겹살구이나 쌈밥 등 만족할 만한 메뉴가 나온다”고 말했다. 2만원대인 저녁과 주말엔 쇠고기 등 13가지 메뉴가 추가된다. 계절밥상을 담당하는 CJ푸드빌 신효정 대리는 “직접 공수한 싱싱한 농산물을 매장에서 판매도 해 손님에게 믿을 수 있는 음식이라는 신뢰를 준 게 주효했다”고 했다. 다시 말해 대기업 식으로 접근하니 한식도 돈이 된다는 거다.

 대기업의 한식 진출을 어떻게 봐야 할까. 경제민주화 바람을 타고 대기업 베이커리는 골목상권 침해라는 여론의 몰매를 맞고 대부분 철수했다. 그러나 한식업계에서는 거꾸로 대기업의 한식업 진출이 점점 활발해지고 있다. CJ와 매일유업·SG다인힐 외에도 신세계와 이랜드도 조만간 한식 컨셉트 식당을 낼 것으로 전해졌다.

 경희대 김태희(외식산업학과) 교수는 “대기업 한식당은 소상공인의 경쟁상대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경쟁 영역이 다르다는 거다. 그는 오히려 시장의 확장이라는 긍정적 측면을 얘기했다. 기존에 프렌치나 이탈리안 식당을 찾던 젊은층을 한식으로 끌어들여 한식 시장을 넓힐 수 있다는 주장이다. CJ푸드빌 임 과장도 “2012년 다담을 처음 낼 때 시장조사를 해보니 한식 시장 약 30조원(매출액 기준, 2011년 통계청 자료) 중 매출 50억원이 넘는 대형 식당 비중은 2%에 불과했다”며 “나머지 98%를 먹겠다는 게 아니라 2%를 훨씬 더 크게 키우려고 시작했다”고 말했다. 외식컨설팅업체 장루하와 한식당 ‘달식탁’을 운영하는 유지영 대표는 “기업때문에 개인이 피해를 입는다는 건 열등감”이라고 말했다. 고객 입장에선 선택 폭이 넓어지고 좋은 음식을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에 먹을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거다.

 때마침 정부의 한식 세계화 정책도 대기업이 한식에 뛰어드는 데 한몫했다. 김중민 FC전략연구소장은 “1990년대 초반까지는 삼원가든이나 한우리 등 육류 중심의 대형 한식당이 한식을 주도했다”며 “2010년 이후 국내는 물론 세계시장까지 겨냥할 수 있는 진화한 형태의 한식당이 생겨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기존에 한식당이 잘 안 되는 이유가 바로 대기업이 한식당에 뛰어든 이유가 됐다.

 한복 디자이너 이영희씨는 “강남에도 깔끔하면서도 맛있는 한식당이 의외로 없다”며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단골집에 ‘무료로 컨설팅을 해줄테니 인테리어랑 그릇을 고급스럽게 바꿔보라’고 제안해도 다들 ‘돈이 너무 들어 힘들다’고들 하더라”고 전했다. 외식 컨설팅 및 메뉴 개발업체인 에이셰프컴퍼니 대표 이상학 셰프는 “한식은 흔한 음식이라는 인식이 강해 고급화하기 정말 어렵다”며 “비싼 돈을 지불하려하지 않아 운영이 힘들다”고 말했다. 프랑스 유학 후 떡집을 낸 독특한 이력의 신용일 셰프도 “한식은 그저 좋다고 할 수 있는 요리가 아니라 신념이 있어야 할 수 있는 장르”라고 말했다.

 그러나 거꾸로 바로 이 지점이 대기업이 끼어들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한 셈이다.

 ‘정’의 이정기 셰프는 “오너셰프 혼자 다 하기엔 부담스럽다”며 “요리 이외의 부분은 회사가 다 알아서 해주니 셰프는 음식에만 집중할 수 있다”고 긍정적으로 봤다.

 물론 곱지 않은 시선도 있다. 최근 가로수길에 ‘쌀가게 by 홍신애’를 연 한식요리연구가 홍신애씨는 “기업이 작은 음식점까지 손대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음식점은 대형화할수록 품질이 떨어지는 데다 작게라도 제대로 된 한식을 추구하는 셰프의 시장을 뺏는다”고 우려했다.

 또 일부에선 기업이 운영하는 식당 요리를 맛 없는 요리로 여기기도 한다. 이상학 셰프는 “유명 맛집 블로거 가운데는 공장에서 찍어내는 공산품 같다는 선입견 탓에 기업이 운영하는 식당을 무조건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고 말했다.
 

글=안혜리·윤경희·심영주 기자
사진=김경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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