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현 교수의 스트레스 클리닉] 대화 피하는 남편 때문에 속 끓이는 결혼 10년차 주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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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결혼 10년차인 30대 후반 주부입니다. 제 고민은 남편의 침묵입니다. 성실하고 크게 속 썩이는 일은 없지만 가끔 그만 살고 싶습니다. 대화하려고 하면 남편은 늘 피합니다. 그런 남편을 보면 나를 무시하나 싶어 더 강하게 이야기하게 되고, 결국 부부싸움으로 이어집니다. 이 남자, 도대체 왜 이런 걸까요. 해결책은 없을까요.

A 인구보건복지협회가 기혼남녀 1200명을 대상으로 하루 대화 시간을 조사했더니 30분 미만이라는 부부가 38.4%였습니다. 대화 내용도 자녀 양육과 관련한 게 40%고 부부 사이에 대한 건 14%에 불과했습니다.

 아마 ‘30분 대화도 길다’고 말할 남편이 꽤 있을 것 같네요. 반면 아내는 30분이라도 집중해서 대화해 달라고 호소할 듯싶습니다. 실제로 제 클리닉에는 대화를 피하고 침묵 시위하는 남편 때문에 화병 걸려 오는 아내가 적지 않습니다. 그런가 하면 반대로 한 번 시작하면 과거 이야기까지 다 꺼내는 아내 때문에 스트레스 받는다는 남편도 있습니다. 남편들은 상황을 악화시키지 않으려면 침묵이 최선이라고 주장합니다.

 한국 남자는 서양 남자보다 더 무뚝뚝해 보입니다. 할리우드 영화를 보면 항상 대화를 나누는 부부 모습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요. 미국 아내도 남편의 침묵 때문에 화를 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아내가 대화를 시작하려 하면 꿀 먹은 벙어리가 되는 남편 때문에 테라피스트(치료사)를 찾는 미국 아내가 많다고 합니다. 남자의 침묵은 문화적 차이가 아니라는 거죠. 왜일까요.

 남성은 여성과 달리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익숙하지 않습니다. 남자가 시시콜콜히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남자답지 못하다’거나 ‘통이 작다’라고 평가받다보니 그런 통제의 틀이 부지불식 간에 뇌에 입력돼 섬세한 대화에 저항하게 되는 것입니다. 게다가 말수 적은 남자가 좋게 평가되는 경우가 많다 보니 더 말이 없어집니다. 결국 대화 훈련을 못 받아 결혼 후 아내와 대화하고 싶어도 쉽지 않습니다. 반면 여성은 어려서부터 긴 수다로 관계에 대해 대화하면서 자연스럽게 대화 기술이 발달합니다. 커피 한 잔 시켜 놓고 반나절도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게 여성입니다. 남자는 자주 만나는 친구와도 그냥 앉아 있으면 무지하게 어색하죠. 회식 때 폭탄주를 마구 돌리는 것도 적막함에 대한 불안을 없애려는 자구책이란 생각이 듭니다. 세 잔 정도 돌고 나면 말이 술술 나오니까요. 그런데 술 없이 다시 만나면 어색하기만 합니다.

 그런데다 대부분의 남편은 아내와 대화하면 항상 본전도 못 건진 밑진 장사를 한 느낌을 받습니다. 항상 KO 패(敗)입니다. 먼저 소리 지르고 화 내는 것도 진 겁니다. 차분하게 아내와 대화해서 승리했다는 남자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여성은 어려서부터 섬세한 대화로 훈련돼 있어 대체로 남성보다 한 수 위의 소통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남편은 ‘아내는 말싸움 준비를 하고 덤비는데 난 아니다’ ‘아내는 내가 한 말과 행동을 모두 기억하지만 난 그렇지 못하다’ ‘아내는 이미 해결된 옛 사건을 계속 끄집어내니 어떻게 방어할지 모르겠다’라고 하소연합니다. 아내랑 이야기하다 보면 비판받는 것 같아 부끄러운 마음이 생긴다고도 합니다. 그래서 대화를 피하고 아예 침묵한다는 주장이죠.

 사실 남자는 여성보다 비판받을 때 ‘욱’ 하는 성향이 더 강합니다. 존경받지 못하고 고립됐다고 느꼈을 때 남자는 즉각적으로 분노합니다. 남자가 사냥하던 수렵 시절부터 이어져 온 공격 본능과 연결된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화를 내면 기분이 더 안 좋습니다. 남자들, 힘만 세지 마음이 의외로 약하니까요. 그래서 화내지 않기 위해 침묵을 선택합니다.

 회식 자리 농담에 아무도 안웃으면 ‘왜 사나’ 싶을 정도로 좌절하는 게 남자입니다. 남자는 칭찬 수위가 올라갈 때 만족감을 느낍니다. 보통의 남편이 아내에게 가장 듣고 싶은 말은 ‘당신이 최고야’라는 겁니다. 그런데 최고는커녕 부정적인 대화를 시작하면 남자는 상상 이상으로 마음의 통증을 느낍니다. 특히 과거사를 꺼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인생이 다 망가진 듯한 느낌마저 듭니다. 아내의 대화 요구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건 대화를 해서 아내를 더 불행하게 만들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불행한 아내를 보면 좌절감을 느끼기 때문이죠.

 그러나 아내 입장에선 대화를 피하고 침묵 모드로 들어가는 남편에게 좌절감을 느낍니다. 남편이 나를 보호하지 않는 남 같은 존재로 여겨지니 괴롭습니다. 남자는 본인 가치가 평가절하돼 작아지는 느낌을 못 견딘다면 여성은 관계가 멀어지는 것에 예민하게 반응합니다. 대화를 피하는 남편에게 아내가 더 들이대는 이유입니다. 추적자가 되는 겁니다. 하지만 추적이 강해질수록 남편은 더 열심히 도망갑니다. 이 쫓고 쫓기는 관계가 반복되면 그대로 굳어 버립니다. 당연히 부부관계가 악화돼 같이 살고 싶지 않을 정도입니다.

 아내들은 호소합니다. ‘어떻게 하면 남편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고요. 남편들도 똑같이 호소합니다. ‘어떻게 하면 아내를 변하게 할 수 있느냐’고요. 그러면서 아내는 더 강하게 압박해야 하느냐고 묻고 남편은 더 피하는 게 맞지 않냐고 묻습니다.

 ‘추적자 아내와 도망자 남편’의 패턴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먼저 문제 본질을 파악해야 합니다. 사람이 아닌 관계의 패턴에 집중해야 합니다. ‘네 행동이 문제야, 네가 바뀌면 우리 관계가 개선될 수 있어’라는 식의 생각과 대화는 상황을 악화시킵니다. 심리적 특성상 아내가 추적할수록 남편은 더 도망칠 수밖에 없고, 더 도망치는 남편을 잡기 위해 아내는 더 추적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추적자-도망자 패턴은 초기에 끊는 게 중요합니다. 오래되면 습관처럼 굳어져 부부 관계에 상당한 악영향을 끼칩니다. 안전한 단어(safe word) 전략이란 게 있습니다. 부부가 대화를 하다 추적자-도망자 패턴이 나오려고 할 때 이를 먼저 인식한 배우자가 미리 정해 놓은 안전한 단어를 이야기 하는 거죠. 감정이 섞이지 않은 중립적 단어죠, 예컨대 ‘라면’도 좋고 ‘제주도’도 좋습니다. 안전한 단어를 상대방이 이야기하면 대화를 멈추기로 미리 약속하는 겁니다. 그리고 조금 떨어져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정리한 후 다시 차분하게 자신의 감정과 이슈를 이야기하는 거죠. ‘속 터지게 언제 그러냐’고 생각하겠지만 그 인내가 바로 상대방에 대한 사랑 아닐까요. 그리고 의외로 효과도 좋습니다.

윤대현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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