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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9)옛날을 되찾으려는 순박한 향토애|고창「모양 성 밟기」|<글 이을윤 기자·사진 이을윤 기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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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보기

종합 03면

<올 들어 전국에서 10만 인파>
전북 고창의 모양성은 수 백년의 풍상을 겪었음에도 성벽이 원형대로 보전되고 울창한 송림을 품에 안은 데다가 특히 아낙네들의 「성 밟기 행렬」로 유명하다. 모양성의 전실을 신앙하는 소복 단장의 부녀자들은 미리 정성스레 준비해온 곡물이나 동전들을 성위 망대에 놓고 예전대로 사방 재배하며 장수무병과 극락 승천을 기원한다.
윤4월에 모양성을 세 번 밟으면 그런 소망이 이루어진다는 전설 때문이며 그것도 돌을 이고 밟아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금년에 이 성을 찾아 오르는 부녀자의 인파가 10여만-. 호남일대는 물론 멀리 서울·부산·제주 등지에서도 제고장을 찾아온다고 한다.
모양성의 성 밟기는 음력 윤달 중에서도 초엿새, 열 엿새, 스무 엿새 날 등 6자가 드는 날이 좋다고 한다. 윤달은 4년 만큼씩 오지만 특히 l세기에 한번쯤 있는 윤3월이 최고라고 한다. 또 이르기는 『한번 밟으면 다리 병이 낫고, 두 번 밟으면 장수하며, 세 번 밟으면 극락에 간다』고도 한다.

<음력 윤달 엿샛날이 길일>
이 같은 모양성의 장수·극락 전설은 어쩌면 성곽을 잘 보수·보호하려는 뜻에서 옛날의 어느 현감이 만들어낸 지혜로운 얘기인지도 모른다. 또 여름과 겨울동안 흙이 깎이고 부풀어 오른 성벽의 보수공사에 원성 없이 주민들을 동원하려던 이 같은 민속전설을 자꾸만 널리 유포시켰을 법도하다. 1965년 사적 제l45호로 지정된 이 성의 총면적은 5만1백72평, 길이는 3천80보(약1천6백80m). 높이 3.6m. 성 둘레에는 석누조(물받이 돌)만도 3천여 개가 있다.
성안에는 관청·현사·사령청·향청·군기고·사창 등 고창현의 모든 관아건물 21동이 있었으나 현존하는 것은 성문이었던 공북루 하나뿐-.
현재 전북 고창군청에 보관돼 있는 이조말기의 「고창현 모양성지도」에는 이 같은 당시의 중요 관아건물의 성내위치와 모형이 잘 나타나 있다.

<사적 백45호, 총 면적 5만평>
사실 모양성 연대는 확실치 않다. 태석에 새겨진「계유소축감동송지문」이란 글자로 미루어 1453년(이조 단종1년 계유)께로 어렴풋이 짚어 보고 있는데 원래 어떤 토성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런데 왜 하필 부녀자들로만 쌓아진 것으로 전해지는 것일까. 이 성의 위치와 중요성으로 보아 멀리 나주·함평·영광·광주·제주 등지에서까지 백성들이 동원됐겠고 그런 지방명과 감독자들의 이름을 새긴 초석이 현재 몇 개 남아 있어 그를 충분히 입증해 주고 있다.
모양성은 호남에 있어 한 군사적 요새다. 그 명칭에 대한 유래는 초한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마한시대엔 모이부(부곡)현, 백제시대엔 모량현, 신라시대엔 모양부리현 등으로 불러오다가 고려이후 고창으로 굳혔다.
그래서 이 성은 속칭의 모양성 이외에 고창성으로도 혼칭되며 현 사적지정의 명칭은 고창 읍성. 고창읍을 둘러싼 성이란 뜻이다.

<77년까지 성을 복원하기로>
최근 몇 년래 이 성을 밟는 사람이 급증한 것은 고창군이 지난 69년부터 해마다 음력9월9일 연례행사로 실시하는 모양성제와 이곳 모양성 복원추진위원회의 선전효과로 올해는 그 절경을 이루어 지난6월2일 하루에만 7만여 인파가 몰리는 일대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현재 성 복원추진 위에서는 고유의 민속보전과 관광개발을 목적으로 올해부터「모양성 복원 4개년 계획」을 세웠다. 건물복원·외곽도로 개설·조경사업 등으로 펴나가기로 한 것이다.
한 때「남고창 북도산」이란 말까지 있었던 고창 고보와 함께 이 지방 주민들의 2대 자랑거리인 모양 성이지만 이제 그 옛 모습을 찾기란 그리 쉽지 않게 됐다. 그러면서 이 고장의 몸부림은 그 곳이 순박한 민속의 터전이요, 또 그 수려한 자연경관과 더불어 내장산 국립공원 개발권 안(직선거리40㎞)에 들어있어 앞으로 관광지로서의 개발이 유망하므로 한층 열을 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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