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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만의 상자 속에 갇힌 과학·인문학 만나야 할 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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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자연과학·인문학의 공동연구 프로그램을 국내 처음 도입한 김두철(왼쪽) 고등과학원 교수와 김상환 서울대 교수. “시대 변화에 따라 학문도 빠르게 바뀌다 보니 유연한 대응이 필수적”이라고 했다. [박종근 기자]

인문학은 자연과학으로부터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반대로 인문학은 자연과학에 어떤 영감을 줄 수 있을까.

 현대 학문의 특징 중 하나는 학문간 교류와 자극이 어느 때보다 활발하다는 점이다. 가령 학제간(interdisciplinary) 연구 혹은 다학제(multidisciplinary) 연구라는 이름 아래 다양한 공동연구가 행해진다. 학문간 장벽을 넘어 서로 돕자는 거다. 그 과정에서 물리화학·인지과학 등 새로운 학문이 생겨나기도 한다. 갈수록 세분화되는 학문이 자기 세계에 갇혀 서로 소통이 불가능하게 된 상황을 개선하자는 취지다.

 국내 최고의 이론과학 연구기관인 고등과학원(원장 금종해)이 2012년 도입한 ‘초학제(transdisciplinary) 연구 ’도 그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학제간’이라는 표현으로는 부족할 만큼 동떨어진 두 학문,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만남이어서 ‘횡단’, ‘초월’을 뜻하는 영어 단어 ‘trans’를 붙였다.

 프로그램의 산파역을 한 김두철(66) 고등과학원 계산과학부 교수와 실제 공동연구에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김상환(54) 서울대 철학과 교수를 26일 함께 만났다. 마침 과학자는 물론 동·서양 철학 전공자들이 모여 수 차례 심포지움한 결과를 묶은 『사물의 분류와 지식의 탄생』 『분류와 합류』(이학사) 두 권이 최근 나왔다.

 초학제의 성과를 묻자 김상환 교수는 “아직은 각자의 연구 방법, 학문 체계를 공유하는 단계”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도 창조적인 지식 탄생의 가능성을 내비쳤다. 가령 “프랑스 현대철학은 생물학의 도움을 크게 받았다”고 했다. “뇌 신경세포의 접합부인 시냅스(synapse)에서 현대 학문 체계를 설명하는 방법을 고안했다”는 설명이었다. 대개 인간의 지식 체계는 커다란 나무 형태로 이해됐다. 중요도·특성에 따라 뿌리·줄기·가지로 학문적 위상을 구분하는 식이다. 이에 대해 프랑스 현대 철학자 들뢰즈는 리좀 모델을 제시했다. 땅속 줄기 식물을 뜻하는 리좀(rhyzome)은 줄기와 가지의 구분도 없고, 중심도 찾기 어렵다. “그런 특징이 더 이상 고정된 범주를 고집하기 어려운 요즘 학문, 그리고 고정된 범주나 체계를 설정하기 어려운 인간의 삶을 설명하는 데 더 잘 들어 맞는다”는 얘기였다.

 김두철 교수는 “과학자들은 말하자면 9회 말 경기를 역전시킨 홈런공의 궤적에만 관심을 쏟는다”고 했다. 과학은 중립적으로 팩트를 수집·정리·기술할 뿐이라는 얘기였다. 팩트의 의미, 경기 역전의 의미를 따지는 인문학이 필요한 이유다.

 김상환 교수는 근대 학문 발전의 역사를 통해 초학제 연구의 의미를 강조했다. 근대학문은 17세기 철학자·수학자였던 데카르트를 기점으로 삼는다. 데카르트 이전까지 학문 분야가 다르면 연구방법도 달랐다. 그는 ‘방법의 통일’을 시도했다. 통합 학문이다. 수학을 기본으로 삼았다. 그런데 연구 방법이 비슷해지면서 점차 학문은 세분화될수록 효율적이라는 생각이 확산됐다. 하지만 지나친 세분화는 오늘날 자기 만의 상자 안에 갇혀 서로 소통 불가능한 지경에 빠진 학문 풍토를 불렀다. 그걸 깨자는 게 초학제 연구다.

 이 대목에서 김상환 교수는 몇 해 전 한국 독서계에서 유행한 미국 생물학자 윌슨의 ‘통섭’ 개념을 비판했다. “낡은 시도”라는 거다. 학문간 통합을 꾀하지만 데카르트식의 단일한 통합 학문을 시도한다는 것이다. 학문 각각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초학제와는 구분된다는 설명이었다.

 김두철 교수는 자연과학 연구 태도와 관련, 다음 얘기를 들려줬다. 경청할 만했다.

 “문제를 위한 문제를 만들어 쓴 논문들이 지금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다. 10년, 20년 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인문학의 도움을 받아 사회에 대한 과학의 연관성(relevance)을 고려한 연구를 하고 싶다. 젊은 과학자들이 너무 인문학 쪽으로 나가면 지금 같아서는 교수 되기가 어렵다. 하지만 과학논문인용색인(SCI) 논문 수만을 따져 교수직 얘기하는 것은 잘못된 방향이다.”

글=신준봉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한국고등과학원(KIAS·Korea Institute for Advanced Study)=1996년 이론과학 분야 집중 연구를 위해 설립됐다. 아인슈타인이 참여한 1930년대 미국의 IAS가 모델이다. 20여 명의 교수 등 110여 명의 인력이 수학·물리학·계산과학을 연구한다.

◆김두철=서울대 전자공학과를 나와 미국 존스홉킨스 대학에서 전기공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물리학부 교수를 거쳐 현재 서울대 명예교수로 있다. 2010년부터 3년간 고등과학원 원장을 맡아 초학제 연구 프로그램을 국내에 도입했다.

◆김상환=프랑스 파리4대학에서 데카르트 연구로 박사를 했다. 서울대 철학과 교수. 현대 프랑스 철학을 동아시아 문맥에서 재해석하는 작업에 힘써왔다. 『예술가를 위한 형이상학』 『철학과 인문적 상상력』 『니체, 프로이트, 맑스 이후』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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