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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대로 못 사니까 … 내 무의식의 단면 마음의 붓으로 그려요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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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rtrait’(2013), 175.5x146㎝, acrylic, pen on canvas

아태지역 문화 허브를 목표로 거국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싱가포르. 매년 1월 전 세계 예술가와 컬렉터들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싱가포르 아트위크’도 그 일환이다. 올해도 13일부터 19일까지 다양한 미술행사가 집중됐다. 아시아의 대표적 아트페어로 자리 잡은 아트스테이지2014를 비롯해 동남아시아 현대미술을 집중 조명한 싱가포르 비엔날레, 신생 예술지구인 길먼 배럭스의 현대 미술전 등 곳곳에서 크고 작은 전시가 미술 애호가들의 발길을 붙들었다.

이 와중에 매우 독특한 이벤트가 열렸다. 대형 컨벤션센터인 선택시티에서 18일 시작된 ‘프루덴셜 아이 어워즈’다. 비영리기구인 패럴렐 현대미술이 2009년 영국 사치갤러리와 협업해 시작한 ‘글로벌 아이(eye) 프로그램’이 호주와 러시아까지 포함한 아시아 전역의 신진 작가를 대상으로 공모전을 벌인 것. 700명이 넘는 응모자 중 회화·조각·설치·미디어아트·사진 부문 최종 후보 20명의 작품전이 2월 5일까지 이어진다.

18일 저녁에는 오프닝에 이어 각 부문 우승자와 전체 우승자를 발표하는 시상식이 펼쳐졌다. 행사를 후원한 프루덴셜, 롤스로이스, 피겟 등 명품 브랜드의 VIP 고객들과 전 세계 컬렉터 수백 명이 참석했다. 오프닝 세리머니가 무르익을 무렵, 이브닝드레스와 턱시도를 차려입은 낯선 부자들 사이로 반가운 얼굴이 나타났다. 지난해 ‘베를린’ ‘더 테러 라이브’ 흥행돌풍과 ‘롤러코스터’ 감독데뷔 등 최고의 한 해를 보내며 충무로 ‘대세’로 입지를 굳힌 영화배우 하정우(36)였다.

하정우는 이 행사에 홍보대사로 참석했다. 그의 회화 두 점도 전시장 한쪽을 장식했다. 알려졌다시피 그 자신도 2010년부터 개인전을 5차례나 열고 각종 미술행사에 활발하게 참여하고 있는 ?뜨는 작가?다. 2월에는 2년 만의 개인전이 청담동 까르띠에 매장과 남산 표갤러리에서 동시에 열린다.

그는 당초 인터뷰를 고사했다. 신진 작가들을 격려하는 행사인 만큼 게스트로서 느지막이 합류해 한국 작가들을 축하해 주면서도 공식적으로 나서는 것은 자제하는 듯했다. 글로벌 아이 설립자인 데이비드 시클라티라 회장 등과 환담을 나누다 시상식이 파하자마자 서둘러 자리를 떴다.

무조건 반사로 따라 나섰다. 길고 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그를 불렀다. 적당히 피해 가리라 예상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에스컬레이터를 몇 발짝 거슬러 오르며 기다려 주더니, 호텔로 향하는 밤거리 산책길을 기꺼이 나눠주었다. 예상보다 훤칠한 키에 긴 다리로 성큼성큼 앞장서는 발걸음을 따라잡기가 숨이 찼다. 로비에 도착, 생수를 주문해 단숨에 비우는 모습은 과연 한 편의 ‘먹방’이었다. 거침없는 답변과 시원한 미소는 동남아의 무더위까지 식혀주는 듯했다.

-본인도 작가인데 어떻게 홍보대사로 참여하게 됐나요.
“원래 공모에 뽑혔는데 촬영일정 때문에 행사 관련 작업에는 참여를 못하게 됐어요. 뽑힌 것만으로도 영광이었고 이런 미술 시상식은 처음이라 색다른 경험이었어요. 저 역시 작업을 하고 있고 그림에 관심이 많으니까, 한국 작가분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면 기쁜 일이겠죠.”

-동시대 작가들의 작품을 보니 어떤가요.
“아이디어들이 참 기발한 것 같아요. 상 받으신 심승욱 작가 작품도 좋았고, 임채욱 작가는 제 전시에도 오셨었고 제가 홍콩 아트페어에 갔을 때 전시를 하고 계셔서 직접 찾아가기도 했었어요. 요즘 작가 중엔 찰스 장이나 박미진·권현진 작가를 좋아해서 작품도 갖고 있어요.”

-이번 전시작은 어떤 작품인가요.
“영화 ‘베를린’ 촬영 직후에 그린 그림이에요. 그때부터 패턴을 이용한 시리즈 작업을 하고 있어요. 장 뒤뷔페를 좋아하는데 그가 펜을 많이 쓴 작가라 저도 요즘 펜 작업을 많이 하고 있어요. 패턴을 이용하다 보니 요즘엔 키스 해링의 느낌도 좀 나는 것 같죠?”

-그림을 배우지 않았는데 드로잉 실력이 좋은 것 같아요.
“그럴 리가요. 화실은 전혀 다닌 적이 없고 그냥 낙서하고 끼적거리는 정도였어요. 그림을 드로잉으로 그린다는 생각은 안 해요. 표현수단의 하나니까 물론 중요하겠죠. 하지만 저는 그림을 그리고 싶은 마음으로 그린다고 생각해요. 어쩌면 그 작업이 제겐 힐링이 될 수도 있고 영화에 더 정진할 수 있게 도와주는 수련일 수도 있는 거죠.”

-솔직히 예술혼보다는 색감이나 디자인 감각이 두드러져 보이는데요.
“보는 사람이 해석하는 거겠죠. 하지만 시각적으로 보여지는 디자인 감각이나 센스를 뽐내려는 작업은 아니에요. 제게 그림은 무의식의 솔직한 표현이랄까 일기장 같은 거예요. 그래서 다른 작가님들처럼 예술혼을 불태우는 것까진 모르겠지만 그림 그리는 작업은 제겐 그런 시간이고 작업이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본격적으로 그린 지는 7년 정도 됐는데 돌아보면 어떤가요.
“창피하죠 뭐. 옛날 일기장 들춰보면 부끄럽고 창피한 거나 똑같아요.”

-신인치곤 전시를 많이 한 것 같아요. 처음엔 공개하기를 망설였다면서요.
“발로 그리든 코로 그리든 이것도 표현의 수단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팬들도 원하고 제 그림에 관심 갖는 사람들도 있어서 공개하게 된 거죠.”

-작년 뉴욕 전시 때는 완판됐다고 들었어요(최근 막을 내린 LA 아트페어에서도 5점 중 4점이 팔렸다). 예술하는 스타들이 과대 평가받는다는 시선도 있지 않나요.
“그렇게 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인지도가 높기 때문에 더 관심을 받는 면이 있겠죠. 그런데 배우든 누구든 꾸준히 진실되게 작업을 해나가면 언젠간 그 마음이 통해서 오해와 편견을 불식시킬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중견작가 수준의 가격이라던데, 작품 가격에 배우로서의 가치까지 포함된다고 보나요.
“정말 그 정도는 아니고요, 모르겠어요. 그저 갤러리에서 정해주는 대로 따를 뿐이죠.”

-예술가는 예민하고 고독해야 할 것 같은데, 하정우는 리더십 있고 성격 좋은 사람이죠. 예술과 좀 안 어울리는 사람 같은데, 그림에는 왜 고독이 묻어날까요.
“저의 외로움과 고독을 사람들이 어떻게 알겠어요. 배우라는 직업이 어떨 것 같아요? 자기 성격대로 막 다 드러내놓고 살 수 있을 거 같으세요?”

-아니겠죠.
“그렇죠. 사회성을 가지고 누구 앞에 섰을 때, 아니 연기를 한다는 직업 자체가 과연 자기 진짜 모습을 노출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제 그림은 관객들로 하여금 내 연기, 내 영화를 더 깊고 재미있게, 풍부하게 보이기 위한 하나의 매뉴얼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물론 방향을 정해놓고 그리지는 않아요. 제 무의식의 단면이기 때문에 어떤 날은 외로운 그림이 나올 수도, 어떤 날은 장난스러운 그림이 나올 수도 있는 것 같아요.”

-작년에 ‘베를린’ ‘더 테러 라이브’ 흥행으로 최고의 한 해였는데, 그림에도 영향이 있었나요.
“유난히 작년에 많이 그리기는 했어요. 일을 많이 하다 보면 스트레스를 받기 때문에 좀 더 혼자 시간을 갖고 그림을 그리면서 달래고 싶었나 봐요. 그래서 작업도 많아진 것 같네요.”

-‘롤러코스터’로 감독 데뷔도 했죠. 그림 그리는 이유가 배우로서 채워지지 않는 창작욕 때문이라면, 연출을 함으로써 충족되는 창작욕은 다른가요.
“영화란 공동작업이니까요. 배우로 참여할 때와 차이가 있다면 감독은 결정을 해야 한다는 것뿐, 공동작업이라는 것은 마찬가지예요. 그림을 그리는 건 혼자만의 작업이기 때문에 그런 차이가 있는 것 같아요. 감독할 때는 시간이 없어서 못 그렸어요. 첫 작품이라 더 조심스러웠거든요.”

-작품이 대부분 인물 중심이고 개인적인 세계관으로 보이는데, 앞으로는 어떤 그림을 그리고 싶나요.
“인물에 대해 좀 더 깊이를 쌓았으면 좋겠어요. 제가 배우고 감독이다 보니까 그런 것 같아요. 모니터를 통해 인물을 보잖아요. 그러다 보니 제일 많이 관심 가는 게 사람이고, 그리려는 것도 뭔가 나를 표현하려는 일이니까. 그래서 인물인 것 같아요.”

-요즘처럼 촬영을 쉴 땐 어디서 영감을 얻나요.
“그림을 꼭 영감을 얻어서 그리지는 않아요. 어떤 것에 꽂혀서 그려야겠다는 날도 있지만, 어떤 날은 무의식적으로 시작하기도 하거든요. 지금은 7월 개봉하는 ‘군도’ 촬영이 끝나고 회사에 출근하면서 위화 원작의 ‘허삼관매혈기’라는 작품을 준비하고 있어요. 크랭크인은 5월에 들어갑니다.”

-첫 감독 겸 주연 작품으로 ‘허삼관매혈기’를 택한 이유는 뭔가요.
“허삼관이라는 인물이 영화적으로 굉장히 풍부한 캐릭터인 것 같아요. 겉으로는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해선 안 될 말들을 툭툭 내뱉곤 하지만 그 마음은 결국 굉장히 따뜻한 사람이거든요. 그런 양면성을 가진 캐릭터가 참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위화의 문체도 굉장히 코믹하고. 그 두 가지만으로도 충분히 영화적으로 재미있지 않을까 싶어요.”

가포르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전호성 객원기자, 까르띠에 코리아, 표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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