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만져봤니, 한탄강 주상절리 들어봤니, 두루미 울음소리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02면

1 겨울 철원에서 볼 수 있는 흰머리수리.

오직 겨울에만 열리는 길이 있다. 강원도 철원 한탄강은 한겨울이면 단단히도 얼어붙어 얼음 트레킹 코스로 변신한다. 주상절리와 직탕폭포 등 한탄강의 명소 곳곳을 얼음 위로 걸으며 생생히 체험해볼 수 있다. 이맘때 철원에는 반가운 손님도 구름처럼 날아든다. 철원에서 겨울을 맞는 두루미와 독수리가 그 주인공이다.

글=백종현 기자 사진=신동연 선임기자

2 한탄강 승일교 주변의 인공빙벽. 3 한탄강에서 가장 넓은 빙판이 펼쳐지는 승일교 아래. 겨울이면 여행자의 놀이터가 된다. 4 비상하는 두루미. 5 식당에서 나온 소 부산물을 먹고 있는 흰머리수리 떼.  

직탕폭포서 고석정까지 얼음길 5.8㎞

영하 15~20도 강추위가 연일 불어닥치던 1월 중순의 철원. 한탄강 승일공원 주변은, 칼바람 아랑곳하지 않고 겨울 여행을 떠나온 트레킹족으로 북적거렸다. 승일공원은 철원군 문화생태 탐방로인 한여울길의 출발점인지라, 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장소다. 하나 관광객 대부분은 말짱한 육지 대신에 강으로 향했다. 그곳에 더 그럴듯한 길이 있어서다.

강 위를 걸었다. 꿈같은 이야기로 들리겠지만, 진짜다. 강원도 철원 한탄강은 한파가 몰아치는 1월 초부터 얼어붙기 시작해, 중순부터 1월 끄트머리까지 그야말로 꽝꽝 언다. 보름에서 길게는 한 달 정도, 두 발로 걸어다녀도 까딱없는 얼음길이 열리는 것이다.

한겨울 한탄강 얼음길은 상류 직탕폭포에서 아래쪽 고석정까지 5.8㎞ 이어진다. 한탄강이 품은 자연 명소가 얼음 트레킹의 출발점이자, 도착점이 된다. 얼음 위를 누비는 묘미만큼 한탄강을 감상하는 즐거움도 응당 클 수밖에 없었다. 다만 유속이 빠른 직탕폭포와 고석정 주변은 군데군데 채 얼지 않은 부분이 있어, 진입할 때 주의가 필요했다.

얼음 안전지대는 승일교에서 송대소에 이르는 3.5㎞ 구간이다. 15~25㎝ 두께의 얼음이 물샐틈없이 꽉 들어차 발을 구르고 뛰어다녀도 전혀 무리가 없었다. 그래도 얼음 트레킹은 안전이 우선이다. 얼음길에 미끄러지지 않으려면 등산화와 아이젠, 스틱이 필수다. 스틱은 얼음을 두드려 안전을 확인할 때도 유용하게 쓰인다.

6 철원 양지리 한탄강 상류에서 두루미 무리와 재두루미 무리가 사이좋게 뒤섞여 여유를 즐기고 있다.

초행자에겐 얼음에 발을 올려놓는 것부터 일이지만, 경험자에겐 얼어붙은 강만 한 놀이터도 없는 듯했다. 눈이 아직 얼지 않은 가장자리를 따라 발자국을 내며 조심조심 발을 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발을 굴러 미끄럼을 타고, 얼음썰매를 즐기는 사람도 있었다.

운동장처럼 너른 폭의 승일교 아래를 지나, 강 상류로 1시간여 걸으면 한탄강에서도 가장 그림이 좋다는 송대소로 접어든다. 송대소 구간이 아름다운 건 뱀 형상의 좁은 협곡과 화산 지형인 주상절리를 품고 있어서다. 주상절리는 27만년 전 벌어진 화산폭발이 만든 기이한 흔적이다. 한탄강이 자랑하는 주상절리를 이렇게 가까이 쳐다보고, 심지어 만져볼 수 있는 것은 한겨울 얼음 트레킹을 하는 사람만의 특권이다. 여름이면 한탄강은 래프팅을 즐기는 사람으로 넘쳐나지만, 급류에 휩쓸리는 와중에 주상절리의 멋과 깊이를 제대로 헤아릴 리 만무하다. 용암이 빚고 강물이 깎아낸 거칠고도 웅장한 현무암 절벽은 어림잡아도 높이 50m는 돼 보였다. 뜨거운 용암의 흔적을 얼어붙은 강 위에서 체험하는 기분은 예상보다 기묘했다.

송대소를 지나 태봉대교에서 직탕폭포로 이어지는 길은 예년에 비해 아직 얼음이 얇아 육지로 돌아갔다. 직탕폭포는 두껍게 언 데를 잘 가늠해 들어가야 한다. 폭포 아래로 바위가 많은데, 바위 주변은 피해서 걸어야 한다. 언뜻 안전해 보이지만, 사실 바위 주변이 가장 먼저 녹기 시작한다. 너비 80m 높이 3m의 직탕폭포도 지금은 반 이상이 얼어붙은 모습이었다. 늘 천둥 같은 낙하음을 내는 폭포가 얼음기둥이 돼 숨죽인 모습을 보니, 한겨울의 중심에 서 있다는 사실이 비로소 실감났다.  

두루미·독수리를 만나다, 겨울 탐조여행

철원은 대표적인 탐조여행지다. 겨울이면 수천 마리의 철새가 찾아온다. 우리에겐 혹한의 땅이지만, 시베리아·몽골 등에서 사는 두루미와 독수리에게는 철원이 그나마 가깝고 따뜻한 땅에 속한단다.

두루미는 철원 양지리 인근의 토교저수지, 한탄강 상류 등지에서 10월부터 3월까지 볼 수 있다. 온몸이 희고 머리 위만 붉은 두루미와, 잿빛의 재두루미가 철원에 모습을 드러낸다.

두루미가 출몰하는 강 맞은편 제방에 탐조시설이 설치돼 있다. 이곳은 새 사진 애호가들에게 꽤 유명하다. 10~15명이 겨우 앉을 수 있는 의자만 갖춘 컨테이너와 비닐하우스가 전부지만, 두루미가 가장 잘 보이는 포인트다. 컨테이너로 들어서자, 독서실의 정적을 깬 것처럼 먼저 온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쏟아졌다. 안에는 여러 에티켓과 ‘정숙’을 요한다는 경고문이 대문짝만 하게 붙어 있었다. 두루미는 작은 인기척에도 지레 달아나 버리는 까다로운 새라서 소음을 내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두루미는 한 시간이 넘도록 보이질 않았다. 전춘기(60) 한국두루미보호협회 양지 지회장은 “요즘 강가로 삵과 고라니가 자주 출몰하는 탓에 두루미 보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고 털어놨다. 철원군청 홍의표(45)씨는 “두루미 사진을 찍으러 온 사람끼리는 사진 포인트에 대해 서로 묻지도 않고 알려주지도 않는 것이 예의”라고 귀띔했다.

“좋은 사진을 찍으려고 욕심을 부리다 보면 두루미의 영역을 침범하는 수가 있어요. 그러나 사람이 한 발 다가갈수록 두루미는 더 멀리 달아나 버리죠.”

시간이 얼마나 더 흘렀을까. ‘뚜루루’ 하는 울음소리와 함께 재두루미 100여 마리가 일제히 한탄강 자락에 내려앉았다. 재두루미는 먹이를 찾아 늪과 냇가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지구에 3000마리 정도밖에 안 남았다는 두루미도 10마리 넘게 보였다. 두루미는 주변을 경계하며 교대로 목을 축였다. 두루미의 우아한 날갯짓과 우렁찬 울음소리는 기나긴 기다림의 시간을 충분히 보상하고도 남았다.

두루미가 내려앉은 자리는 컨테이너에서 100m 이상 떨어져 있다. 400㎜가 넘는 렌즈는 있어야 제대로 된 사진을 건질 수 있다. 육안으로는 윤곽만 보여, 고배율 망원경을 가져가는 게 이롭다.

두루미에 비해 독수리는 보기 쉬운 편이었다. 우리가 흔히 독수리라 부르는 흰머리수리의 아지트는 문혜리에 있는 한우음식점과 도축장 맞은편의 논밭이었다. 사냥을 못하는 흰머리수리가 야생에서 동물 사체를 구하기 힘들자 아예 도축장 앞에 진을 친 것이다.

정오 무렵이 되자, 200마리가 넘는 흰머리수리가 논을 까맣게 채웠다. 굶주린 흰머리수리는 식당과 도축장에서 쓰레기로 나온 소기름과 내장 더미를 허겁지겁 뜯어 없앴다.

문혜리에도 철새를 쫓아온 사진 애호가가 많았는데, 대부분 멸종위기 흰꼬리수리를 찾고 있었다. 사냥 능력이 있는 흰꼬리수리는 확실한 목표물을 정하기 전까지 땅으로 내려오는 경우가 거의 없어, 가까이서 포착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겨울 탐조 여행은 과연 추위와 기다림과의 싸움이었다. 그래도 후회는 없었다. 추워야 볼 수 있는 모습이기 때문이었다.

●여행정보 한탄강 얼음 트레킹 코스까지는 서울시청을 기준으로 자동차로 2시간30분 정도 걸린다. 승일공원에 무료 주차장이 있다. 얼음 안전지대는 승일교에서 송대소에 이르는 3.5㎞ 구간으로 왕복 2~3시간이면 충분히 돌아볼 수 있다. 얼음이 약한 직탕폭포 주변은 들어갈 때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두루미를 볼 수 있는 컨테이너는 양지리사무소 인근에 있다. 한국두루미보호협회 양지 지회에서 컨테이너 유지와 두루미 먹이를 공급하기 위한 목적으로 입장료 1만원을 받는다. 3월 이후 두루미가 떠나고 나면 컨테이너도 문을 닫는다. 철원군청 문화관광과(tour.cwg.go.kr) 033-450-5151.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