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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나의 눈, 나는 너의 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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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서울 송파구청 장애인복지팀 고은성 주무관(왼쪽·시각장애)이 수화통역사 정미희(청각장애)씨에게 수화를 배우고 있다. 양손 엄지와 검지를 펴고 손목을 돌리는 건 ‘아니다’라는 뜻이다. [김경빈 기자]

전화벨이 요란히 울렸다. 전화기 앞에 앉은 고은성(36·8급) 주무관이 전화를 받았다. 서울시내 25개 구청에 접수되는 민원 전화를 처리하는 다산콜센터(120) 상담사가 장애인 임대주택을 분양받기 위한 무주택 산정 기간이 언제부터 시작되는지를 물어온 거였다. 고 주무관은 옆자리에 앉은 정미희(49·계약직 직원)씨에게 “(서울시가 제공하는 복지 서비스가 총정리된) 지침서를 확인해 주세요”라고 했고, 이에 정씨는 내용을 파악한 뒤 “장애인 등록을 마치는 순간부터 가능해요”라고 말해줬다. 고 주무관은 상담사에게 민원 내용을 설명해 줬다.

정씨가 청각장애인 통역 맡은 뒤 협업

 지난 20일 서울 송파구청 7층 복지과에서는 1급 시각장애인 고 주무관과 2급 청각장애인 정씨의 크고 작은 협업이 하루 종일 이어졌다. 눈이 안 보이는 고 주무관은 컴퓨터 화면의 문자를 읽어주는 ‘스크린 리더’로 일을 처리한다. 정씨는 사람의 입 모양만으로 대부분의 말을 이해하며 업무를 보고 있었다.

 이날 고 주무관은 ‘장애인 반찬 배달 서비스 계획’에 대한 기안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하지만 ‘스크린 리더’라는 프로그램은 한계가 있었다. 일을 마무리하는 데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했다. 예전엔 남에게 도움을 청하는 게 망설여졌는데, 이젠 정씨가 고 주무관의 ‘눈’ 역할을 하고 있다. 고 주무관의 일이 마무리될 때쯤, 정씨는 자연스레 의자를 끌어와 컴퓨터 앞에 앉았다. 정씨는 스크린 리더가 잡아내지 못한 띄어쓰기·줄바꿈을 바로잡았다.

 “고 주무관, 이제부턴 내게 맡겨요.”

 “앞으론 언니라고 불러야겠어요. ”

 사무실 저편에서 복지팀장이 정씨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고 주무관은 정씨의 어깨를 짚으며 “팀장이 부르니 가보라”고 말했다. 정씨는 고 주무관의 입을 보고 내용을 파악한 뒤 팀장에게 달려갔다. 이번엔 고 주무관이 소리가 안 들리는 정씨의 ‘귀’가 된 셈이다. 출근부터 퇴근까지 화장실에 가는 5분을 제외하곤 둘은 항상 함께한다. 회식 자리에서도 마찬가지다. 정씨는 “남편보다 고 주무관과 보내는 시간이 더 많다”고 말했다.

고씨가 문서 작업하면 정씨가 마무리

 올 1월 2일부터 두 사람의 ‘동행’이 시작됐다. 정씨가 ‘청각장애인 통역사’로 일하면서부터다. 시간이 흐를수록 두 사람은 서로의 귀가 되고 눈이 됐다.

 두 사람 모두 후천적으로 장애가 생겼다. 고 주무관은 22세 때인 2000년 다른 대학에 다니다 숙명여대 3학년에 편입했을 때 장애가 갑자기 찾아왔다. 처음엔 먼 건물이 보이지 않더니 앞에 있는 사람마저 안 보였다. 랜턴 없이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모든 사물에 검은 점이 찍혀 보였다. 광장에 내리는 눈도, 눈 위를 지나는 주황색 택시도 모두 검게 보였다. 병원에서 망막색소변색증 진단을 받았다. 개그맨 이동우씨로 인해 많이 알려진 병이다. 더 나빠질 거란 의사의 말이 보이지 않는 눈 때문에 더 또렷이 들렸다. 결국 학사경고를 받고 학교를 떠났다. 모든 것이 보이지 않게 될 때쯤 ‘다시 공부를 해야겠다’는 의지가 생겨났다. 2006년께 사이버대학에 재입학해 사회복지학을 전공했다. 각고의 노력 끝에 2010년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고 지난해엔 결혼도 했다.

 관동대 84학번인 정씨는 강릉이 고향이다. 1976년 초등학교 5학년 신체검사 날. 선생님이 귀에 대준 아날로그 시계의 초침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고교 땐 거의 소리가 안 들려 좋아하던 영어 공부를 접었다. 정씨는 “취업도 해봤지만 2년 만에 그만뒀다”고 했다. 그후 전업주부로 살았다. 그러다 7년 전 송파구 장애인 지원사업을 통해 주민센터에서 일하며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따고선 쭉 주민센터에서 일해 왔다.

 두 사람은 “선천적 장애인들보다 장애로 인한 불편을 아는 게 지금 업무를 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입을 모았다. 고 주무관은 “정보에 어두우면 장애 등급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장애를 얻고 나서야 알게 됐다”고 했다. 정씨는 “고령화 시대라서 누구나 장애를 갖게 될 수 있다”며 “정상인과 장애인, 두 개의 삶을 살았기에 모두에게 잘 다가갈 수 있다”고 했다. 정씨는 난청에 시달리는 노인들의 민원을 해결하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구청장 등 동료들도 점자명함 만들어

 두 사람은 구청의 사소한 것들을 바꿔놓고 있다. 지난해 연말 엘리베이터에 층수를 알리는 음성안내장치가 설치됐다. 박춘희 구청장을 비롯해 공무원들의 명함은 점자명함으로 교체됐다. 구청 앞 은행에는 청각장애인 수화상담창구가 마련됐다. 박 구청장은 “장애도 손을 맞잡으면 문제가 없다”며 "두 사람의 협업은 장애인 복지의 또 다른 모델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고 주무관에게 장애는 어떤 걸까. “누군가에게 손을 벌릴 수밖에 없는 게 사람인데 장애란 좀 더 자주 손을 벌려야 하는 불편함일 뿐 입니다.”

글=강기헌 기자
사진=김경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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