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졸업생에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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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어떤 삶을 살게 될지 기약이 없는 채로 새로운 목숨이 탄생하고, 어떤 삶을 살았는지 가림이 없이 모든 목숨에 사별이 찾아오는 것이 세상에 매듭을 주는 자연의 의식이다. 그와 비슷하게 어떤 대학생활을 영위하게 될지 확실한 기약을 할 수 없는 채로 입학식이 거행되고 어떤 학창생활을 하였는지 가림이 없이 4년이 지나면 그 학창을 고별하는 졸업식이 거행되는 것이「캠퍼스」의 의식이 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캠퍼스」의 의식을 통해서 현대의 모든 국가사회는 「새로운 피」를 얻게 된다.
대학생활의 어수선한 4년을 되돌아보며 벌써 졸업이냐고 살같이 빠른 시간의 흐름에 대하여 새삼 감정에 젖을 졸업생도 있을 것이다. 졸업이라니 그 동안 무엇인가 이것이라고 내놓을 만큼 터득한 것이 있었다는 말인가 하고 지나간 학창생활에 대하여 회의에 잠겨 있을 졸업생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개별적인 감회나 회의에 구애됨이 없이 대학은 졸업생을 내보내고 사회는 그들을 받아들인다. 어중간한 타협일랑 단호히 거부하는 청춘의 고유한 기질인「퍼픽셔니즘」(완벽주의)이 여기서 우선 좌절을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그 다음 졸업생 모두가 뜻에 맞는 직장을 얻었다고 볼 수도 없으며 또 얻었다고 느끼고 있지도 않을 것이다. 모두가 소원대로 해외유학이나 대학원 진학의 기회를 얻었다고 볼 수도 없다.
그리고 그 다음에 이내 닥쳐 올 또 하나의 중대한 문제로는 남녀졸업생이 다같이 조만 간에 맞게 될 결혼에 있어서 그 맺음이 반드시 젊은 날의 부푼 꿈속에 그리던 것과 같은 그러한 이상적인 가정이 금방 실현되리라는 보장도 없다.
이처럼 젊은이의 「퍼픽셔니즘」은 겪어야 할 많은 시련이 가로 놓여 있고 그것은 경우에 따라 과거에 쌓았던 인생관에 근본적인 수정을 강요하게 될 지도 모른다.
그러나 거기에서 좌절해선 물론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인생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졸업생들에게 체념이나 타협을 종용하는 말은 아니다. 삶이란 죽는 날까지 불완전한 것, 완수 할 수 없는 것이요,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삶에는 날이 날마다, 달이 달마다, 해면 해마다 보다 나은 삶에의 가능성의 지평이 열리고 있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다.
직장이나 가정이나 처음부터 완전한 직장, 완전한 가정은 없다. 완벽한 기 제품으로서의 일터나 집이 졸업생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졸업생 스스로 그 안에 들어가서 스스로의 체질에 맞게 직장과 가정을 만들도록 그것들은 가망 적인 형태로 주어진 것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완벽한 것을 추구하는「퍼픽셔니즘」을 단념하라는 것은 소극적인 타협이나 은둔을 설교하는 것이 아님도 바로 이런 뜻에서이다. 현실을 현실대로 인식하되, 그러나 그를 냉소하지 않고 자기에게 주어진 이상 일터건, 가정이건 그것을 나의 발전적인 가능성의 터로 생각하고 거기에 자기의 발자국과 창의적인 필적을 남겨두는 적극적인 자세. 사회는 그것을 대학졸업생이라는「새로운 피」에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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