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김상일<문학평론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우리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공간이 있다. 고향도 그 하나가 된다. 왜 잊지 못하는가. 거기서 얼른 농토나 황소의「이미지」가 떠오를 것이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요람이었고, 사랑이요, 원시생명 혹은 모성이었기 때문에 잊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또 모닥불이요, 별이요 ,행복이요, 때로는 소나기요, 매 한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고향은 전설이나 신화가 되곤 했지만 이 달의 몇몇 우수 작들은 고향의 그러한「이미지」가「패턴」이 되고 있다.
먼저 박경수씨의『고향의 어른들』(신동아). 제목이 일러주고 있는 바와 같이 고향의 어른-이미 작고한 친구의 부친의 그 영 궤에 인사를 드리기까지의 과정을 담담한 필치로 보여준 단편이지만 그러나 조심스럽게 읽었다면 문제성을 띤 작품임을 발견했을 것이다. 알다시피 성급한 우리 사회는 수평적 인간관계만이 그 전부라고 믿고 있었고 그래서 어른들에 대해서도 대등한 관계만이 있었지만 이 단편은 새삼스럽게(?) 수직적 인간관계를 유독 강조하고 있다. 문제작이라고 지적한 또 다른 이유는 그러한 수직적 인간관계를 소급해 올라가면 반드시 고향-그러니까 생명의 발상지가 있고, 그래서 이 고향은 성역(영궤가 그것이다)이요, 조국애도 거기서 비롯한다는 사실이다.
최일남씨의『장미다방』(현대문학)은 직행「버스」가 흙먼지를 날리며 쏜살같이 통과하는 어느 면소재지에 다방이 생기면서 일어나는 반응-호기심의 대상이었다가, 관심 밖이었다가, 말썽의 씨였다가 대학의 장소였다가 한 반응을 그린 단편이다. 이 <문화휴게실>은 <봄이면 거름 내고 여름이면 김매는 사람들과는 상관없이 j면 일대에 겉으로 떠있는 사람들의 것>일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외래의 문화시설 따위는 본질적으로 농경문화권속에 정착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청준씨의『건방진신문팔이』(한국문학)는 여러 가지 독법으로 읽을 수 있는, 그래서 그만큼 문제성을 지니고 있는 작품이다. <정말 이상스럽게 건방진 신문팔이>는 우리가 평생 잊지 못하는. 가령 모성이나 연인, 혹은 고향의「이미지」, 혹은 원시생명, 혹은「리비도」를 가리키고 있었다고 읽어도 무방한 것이다. 이 점에서 이 작가는 여간한「테크니션」이 아니었지만 이 단편은 그렇게 이상스런「이미지」가 기억이나 무의식의 영역 속에 침잠해 가는 과정을 집요하고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는 점에서 독자는 이 작품을 오랫동안 잊지 못하리라.
서영은씨의『야만인』(한국문학)은 그러니까「로렌스」적인 주제를 다룬 작품이다. 이 단편의 도입부 말고 그 전반부는 여편네의「네글리제」나 식료품 몇 가지를 사들고 돌아오는 「부르좌지」의 평온 무사만을 바라는 속물근성을 신랄하게 조소하고 있었고 후반부에 들어서면 상황은 일변하여 원시생명과의 교감을 노래하고 있다.
조선작씨의『모범작문』(월간중앙)은 현대의『욥기』로서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선량한 사람은 불행하고 악한 자는 오히려 번영을 누리는 사회를 어린 국교 생의 눈을 통해서 「시니컬」하게 비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신문을 읽다말고 염병을 할 놈, 오살을 할 놈…하고 분격하고 있었고, 아버지는 고무다리였다. 상이용사. 어머니는 술을 몹시 좋아했고 취하면 <굳세어라 금순아><울며 헤진 부산항>의 명창이었다. 생업은 <색시장사>. 어린 국교 생은 이 가정이 시사하고 있는 바와 갈이 도덕적 무질서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이 녀석은 노리개 감으로「콘돔」을 가지고 놀아야 했고「텔레비전」이 없으니 CM「송」을 모른다는 이유로 팔푼이라는 누명을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어린 국교 생은 죄인이었다. 그러나 위대한 죄인이다. 왜냐하면 이 죄인은 자기 의무가 무엇이며 수치감과 회한과 불안, 더욱이 애타적 감정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가 비록 악의 온상에서 성장하고 있긴 했지만 여간 윤리적인 소년이 아니었기 때문인 것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