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김주만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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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한 사람의 차가운 죽음이 천만 사람의 마음을 뜨겁게 하고 있다. 전 경북 교육감 김주만씨는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근래에 보기 드문 위대한 죽음을 한 것이다.
자살이 삶과 죽음의 두 극단의 전 변이라 한다면 김주만씨의 죽음은 다른 의미에서 우리 사회의 두 극단을 졸지에 들추어냈다고 할 수 있을 것도 같다.
한쪽에 부정·부패, 그리고 마비된 책임감으로 타락된 세태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정직·청빈, 그리고 죽음에까지 이르는 책임감의 사도가 있다.
부정과 부패와 무책임의 퇴폐풍조가 이 사회에 이처럼 짙지만 않았다 하더라도 한 강직지사의 자살이 이처럼 선열한 조명을 받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사회의 양심이 그처럼 마비되지 않았던들, 한 양심의 결단이 뭇 사람들의 마음을 이처럼 아프게 때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보면, 우리 사회는 이미 오래 전부터 고 김 교육감과 같은 분의 죽음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고 해야할지 모른다. 그는 바로 이러한 사회의 정화와 사도의 확립을 위한 제단에 스스로 희생의 공물로 몸을 바친 것이다.
실상, 어떤 의미에서는 삶과 죽음이란 살아있는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두 극단은 아니다. 자살하는 사람만이 죽는 것도 아니다. 모든 사람이 결국은 조만 간에 죽게 되기는 마찬가지다. 그래서 철학자들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죽음이란 불가능하다고도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스스로 의욕한 죽음이란 스스로 의욕하면 죽지 않을 수도 있는 자유의지에 의한 불사가 가능해야만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죽음은 삶의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삶 속에 내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에 죽음에의 의지는 삶에의 의지와 결코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참되게 살겠다는 뜻이 오히려 죽음을 의욕 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김주만씨의 자살이 바로 그러한 죽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왜 사람들은 삶을 단념하고 스스로 죽음의 길을 선택하는 것일까. 그것은 한 마디로 사람이 그 속에 몰입하여 스스로를 일체화할 수 있는 근거를 잃었을 때, 삶의 모든 행위가 졸지에 목적을 잃고 의의를 상실할 매 사람들은 죽음을 바라보는 것이다.
34년이라는 긴 외줄기 사도의 길을 걸어오던 교육행정가가 자기 소관 내에서의 부정사건 때문에 명예롭지 못하게 물러났을 때, 그리고 그 사람이 교육을 천직으로 알고 남 못지 않은 강한 책임감과 자존심을 가진 사람일 때, 그에게 갑자기 삶의 목적이나 의의가 무산해 버렸다해서 놀라울 일은 아니다.
고인의 주변에서 생전의 그의 성품과 생활을 가까이 아는 여러 사람들이 하나같이 그의 청렴결백을 칭송하고 있음을 들을수록, 그렇다면 왜 그를 임기제의 교육감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였는지 묻고 싶은 안타까움을 누를 길이 없다.
누가 그를 34년의 외줄기 사도에서 내몰았는가. 사람마다 가슴에 손을 얹고 반성해 볼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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