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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와 경제 둘 다 좋은 말인데 창조경제는 뭔가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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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8호 11면

아시아 연수 프로그램에 참가한 하버드·MIT대 학생들이 17일 김앤장 법률사무소를 방문해 목영준 위원장(가운데) 등 사회공헌위 소속 변호사들과 환담하고 있다. 최정동 기자

“‘창조’와 ‘경제’, 다 좋은 말이죠. 그런데 둘을 합친 ‘창조경제’라는 건 뭔지 감이 안 옵니다. 언론 보도와 한국 정부 설명을 종합해볼 때 중소기업 장려와 창업 생태계 장려에 정부가 역할을 하겠다는 뜻인데, 그렇다면 한국 정부의 지향점은 ‘작은 정부’가 아닌 ‘큰 정부’인 건가요.”(제니 진, 매사추세츠공대 MBA 슬로언 스쿨)

한국 의원 진땀 나게 한 하버드·MIT의 공부벌레들

“실패를 통한 성장은 청년 창업의 주요 동력인데, 한국은 실패가 용납되지 않는 사회라고들 하더군요. 이런 사회적 금기를 깨고 실질적으로 청년 창업을 독려하기 위한 정부의 장·단기 대책이 궁금합니다.”(카르멘 플로레스, 하버드대 비즈니스 스쿨)

“지도자들이 북한을 묘사하는 말을 분석해 보면 북한은 비이성적인 집단 같습니다. 하지만 지난달 평양을 방문해 보니 그들에겐 나름의 논리가 있더군요. 거기에 동의하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남북은 귀를 막고 등을 돌린 채 각자 하고 싶은 이야기만 하는 것 같아 답답합니다.”(익명 요청한 하버드대 존 F 케네디 스쿨 인도인 학생)

하버드·MIT 학생들은 15일 국회에서 새누리당 길정우·이재영 의원들을 만나 북한 및 창조경제 정책에 대해 질문을 쏟아냈다. 10분간 예정된 토론은 50분간 계속됐다.

15일 오전 국회 본관 귀빈식당. 새누리당 길정우·이재영 의원은 봇물처럼 쏟아진 질문에 진땀을 뺐다. 애초 11시50분부터 10분간만 하기로 했던 ‘환담’은 40분을 훌쩍 넘겼다. 질문 공세의 주인공은 이날부터 4일간 방한한 미국 하버드대·매사추세츠공대(MIT) 와 국제정치학 명문인 터프츠대 플레처스쿨의 석·박사 과정 학생 38명. 세 학교가 연합해 구성한 ‘아시아 리더십 트랙(ALT)’ 연수 프로그램에 5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선발된 학생들이었다.

길 의원과 이 의원은 “박 대통령이 ‘통일은 대박(jackpot)’이라고 한 건 통일에 대한 관심을 다시 환기시키기 위해 한 말이었다”며 “국민소득 3만 달러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선 이제 우리 경제발전의 패러다임을 바꿔야 하고, 그 핵심 키워드가 창의력이라는 것이 창조경제의 배경”이라는 설명을 이어갔다. 학생들은 눈을 반짝이며 때론 받아 적고 때론 손을 들어 반론을 제기했다.

애초 덕담이나 나눌 요량으로 간담회에 응했던 두 의원은 학생들의 날카로운 질문 공세에 통역 없이 50여 분간 열띤 토론을 벌였다. 낮 12시40분이 다 된 즈음에서야 “더 이상 음식이 식으면 맛이 없다”는 진행자의 농담에 학생들은 겨우 질문 공세를 거뒀다.

서울·상하이 등 5개 도시 돌며 ‘열공’
연수 참가자들은 인도에서부터 베네수엘라, 20대에서 50대 초반까지 국적도 연령대도 다양했다. 이 연수프로그램을 기획한 하버드대 아시아리더십위원회 측은 미 동부의 세 학교 재학생 중 ^아시아에 대한 관심과 지식이 있고 ^각 분야에서 5년 이상의 경력을 갖춘 학생을 대상으로 참가자를 뽑았다.

이후 면접 등 과정을 거쳐 선발된 학생들은 지난해 12월 31일부터 이달 19일까지 총 20일간 상하이(중국)·쿠알라룸푸르(말레이시아)·싱가포르·홍콩·서울 등 5개 도시를 방문했다. 마지막 행선지인 서울에서 이들은 청와대를 방문해 윤창번 미래전략수석과 간담회를 한 데 이어 국회에선 황우여 새누리당 대표, 길·이 의원과 토론을 벌였으며 비무장지대(DMZ)와 삼성전자를 견학하기도 했다.

국회 본회의장 견학 중엔 전자투표 시스템에 큰 관심을 보였다. 투표를 한 의원들의 이름이 전광판에 표시된다는 설명을 들은 레이첼 로(하버드대 존 F 케네디스쿨) 학생은 “비밀투표가 아니라는 거냐”고 물었다. 이에 안내원은 “한국 국회의원들은 당론에 따라 투표하는 경우가 많은 편”이라고 답하며 진땀을 뺐다.

학생들은 기자를 붙잡고도 복도에서 “통일 비용에 대한 젊은 층의 생각은 뭔가” “북한의 급변 사태 가능성에 한국 국민들은 어느 정도로 대비하고 있나” “윤창번 청와대 수석이 ‘혁신센터’를 전국에 17개 만들 거라고 하던데 구체적 운영 방안은 뭐냐” “한국 언론 자유 수준은 어느 정도인가” 등을 캐물었다. 일정이 계속 지연되는 바람에 진행요원이 울상이 되자 학생들은 마지못한 표정으로 “나중에 e메일로 질문해도 되느냐”며 명함을 챙겨갔다.

지위 고하 막론하고 날카로운 질문
학생들은 연수프로그램 시작 3개월 전부터 방문 도시 ‘예습’에 나섰다. 프로그램을 총괄한 아시아리더십위원회의 김흥수(하버드대 존 F 케네디 스쿨 석사과정)씨는 “전체 학생이 3개월간 정기적으로 모여 방문 예정국에 대한 워크숍을 진행했다. ‘좋은 질문을 하는 법’부터 공부했다”고 소개했다. 그는 “하버드대에선 학생들에게 교수님에게도 두려워하지 말고 질문하라고 가르친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자신의 논리가 있고 궁금한 게 있으면 정면으로 승부하라는 얘기”라며 “그런 수업 분위기를 워크숍에도 똑같이 적용했다”고 설명했다.

참가자 중엔 FBI 요원까지 있을 정도로 직업군도 다양했다. FBI 요원인 니키 스코브란(미국인)은 기자가 다가가자 ‘레이저 눈빛’을 쏘더니 “직무 규정상 기자와 얘기하면 안 된다”며 답변을 거부했다. 그는 다른 학생들과 달리 간담회에서 질문도 일절 하지 않았다. 오가는 설전을 경청하며 때론 노트할 뿐이었다. 하지만 스코브란을 제외한 거의 모두는 질문을 못해 안달이 났다. 이유를 묻자 이구동성으로 “아시아가 궁금하니까”라고 답했다.

“같은 아시아라고 하지만 동남아의 개발도상국부터 동북아의 선진국들까지 스펙트럼이 넓다. 동북아엔 한·중·일 외교 갈등에다 북한이라는 존재까지 있어 국제정치학도인 내게 아시아는 운명과도 같다. 21세기는 아시아의 시대다.”(플레처스쿨 라스 한센, 노르웨이인)

“아시아 중에서도 한국은 단기간에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동시에 이뤄냈다. 성공을 위해 숨가쁘게 달려온 신화의 이면엔 가려진 부작용이 분명히 있을 텐데, 그 문제를 사회 구성원들이 어떻게 풀어가고 있는지가 가장 궁금하다. 그 교훈은 다른 아시아 국가에도 의미가 크기 때문이다.”(하버드대 존 F 케네디스쿨 레이첼 로, 말레이시아인)

대학 방문해 재능기부 강연도
학생들은 가는 곳마다 재능 기부도 빠뜨리지 않았다. 19일 연세대에선 청소년들을 위한 재능 기부 강연도 했다. 쟁쟁한 대학의 학생들이지만 주제는 좀 특이했다. 참석자들은 성공담이 아닌 실패담을 들려줬다. 창업을 했다가 실패했던 쓰라린 경험 등을 실감나게 이야기했다. “망해봐야 나중에 성공한다”는 내용이었다.

주제 선정 이유를 묻자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의 비두슈 테크리왈(인도) 학생은 기자에게 “젊을 때 실패하지 않으면 언제 (실패)할 건데?”라고 물었다. 이제 30대 초반 여성인 테크리왈은 “나도 대학원 오기 전에 캘리포니아에서 친구들과 IT 관련 사업을 했다가 망했다. 쓰라린 기억이지만 무엇보다 값진 경험이다. 지금 학교에서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나를 키운 건 그 실패였다. 배우기 위해 실패하는 거다. 나중에 더 크게 성공하기 위해”라고 했다. 그러면서 물었다. “그런데 한국에선 실패는 부끄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사실이냐”고.

프로그램을 기획한 김흥수씨는 “고려대의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 현상 이야기를 해줬더니 다들 흥미로워했다”며 “학생들이 자기들의 성공이 아닌 좌절을 통해 한국 사회 청소년들에게 영감을 주길 원했다”고 말했다. 학생들이 ‘한강의 기적’과 같은 성공담이 아니라 그 뒤에 감춰진 부작용에 더 깊은 관심을 보인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이날 강연에서도 “실패는 부끄러운 게 아니다. 실패를 해 놓고도 거기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고 성장하지 못 하는 게 부끄러운 거다”라는 메시지가 주를 이뤘다.

앞서 17일 오후 김앤장법률사무소 사회공헌위원회 소속 변호사들과의 만남에서도 비슷한 대화가 오갔다. 만남은 학생들이 한국 사회 지도층의 사회공헌 활동에 대해 듣고 싶다는 요청에 의해 이뤄졌다.

목영준 김앤장 사회공헌위원장은 “세계 각국의 젊은이들이 공부뿐 아니라 직접 아시아 현지를 돌면서 자신들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모습이 인상적”이라며 “그러면서 자신들의 경험담을 나누며 주고받는 모습이 진정한 사회공헌이 아닐까 한다”고 소감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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