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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본사 박중희 특파원「부카레스트」여로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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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준령들이 솟은 고원이 약간 고개를 숙이면서 눈 아래에 펼쳐지는「클루지」시의 첫 인상도 정치적인 동구를 느끼게 하기보다는 우선은 남구라는 것에 가깝다.
5∼6층 짜리 세기초 전후의 석조건물들이 쫙 깔린 위로 깊고도 오랜 뿌리가 아름드리 통나무들을 하늘높이 치솟게 한 듯 여기저기 솟아 있는 첨탑들. 멀리서「비잔틴」문화의 물결이 동북으로 흘러 올라간 흑해연안이 멀지 않은 탓인지 동방정교회의 둥근 지붕들이 시정위로 무슨 연꽃모양 둥둥 떠있다.
차를 멈추고「피아타·스테만·첼·마레」정교회 속을 어슬렁 들어가 본다. 정문어귀 성모상 앞에 갓 꺾어다놓은 생화 다발과 함께 스무남은의 가느다란 촛대들이 너울너울 이름 모를 신도들의 소리 없는 기도들을 불태우고 있다.

<알파벳 활자체로 쓴 구호>
안에선「목자」들이「그레고리」송가를 부르고 서있고 중 노년 부녀들이 꿇어앉아 사제 복의「치마」폭 밑으로 머리를 파묻었다 뺐다 하며 예배를 보고 있다.
그러나 여긴 역시 사회주의공화국이다. 성당 바로 앞의 녹음 진 광장에 나오니까 중앙 석대 위로 검정무쇠의 소련「탱크」포신이 하늘로 치솟아 있다. 2차 대전 때「나치」점령군을 몰아낸『소련군의 전승을 기념해 세운 것』이란다. 광장 한편에 있는 노란색으로 말끔히 만장된「르네상스」식 3층 건물은 이 지방 공산당 본부쯤 되는 듯『세계노동자여 단결하라!』가 영어독본 첫 장에 나오는「알파벳」활자체로 처마 밑에 새겨져있다.
성당꼭대기의 십자가, 소련「탱크」의 포신, 장식물 같은「슬로건」등 이런 것들이 별 저항 없이 한데 모여 천연덕스런 구도를 이루고 있다. 그늘진「벤치」에서 뜨개질을 하다 동양인 구경을 하던 곱게 늙은 아주머니가 눈이 마주치자 눈웃음의 인사를 보낸다.

<전근대와 초현대 뒤범벅>
여기서 남쪽의「부카레스트」로 곧장 달릴까 하다 자동차「핸들」을 동북쪽의 소련과의 접경지역으로 꺾는다. 꼭 수도나 도시라해서 맛일 턱도 없다. 그 나라를 꼭 대표하는 것도 아니다.
「카르파치아」산맥을 끼고있는「몰다비아」지방은 문자그대로 산자수명한 자연의 풍치도 풍치려니와「수체아바」근처의 수도원들은「유럽」에서도 비경의 하나로 손꼽혀 온 것이다.
자동차가 굽이치는 산길을 따라 달리면서 창 밖의 정경은 도시와는 여러모로 달라진다. 오삭 십리씩이나 떨어져 나타나는 시골길엔 간간이 마차들이 오가고 산언덕 풀밭엔 양떼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다.
소련과의 국경 쪽이 가까워짐에 따라 농가들은 초가가 아닌 이를테면 목조가옥들이 많아진다. 지붕들은 도마만한 크기의 널빤지들을 포개어 엮어놓았다.
벽도 대부분이 통나무를 그대로 쌓아 올린 것이거나 널빤지를 덮어놓은 게 퍽 소박한 편이다. 길도 주요간선도로를 빼놓고는 변변히 포장된 도로란 찾아보기 힘들다. 간간이 농가 처마 끝에 석유남포들이 걸려있는 것은 전화가 아직 이루어지지 앉았다는 얘기일까.

<경비행기가 농약 뿌리고>
그런가하면 경비행기가 들판에 농약을 뿌리며 머리 위를 스쳐간다. 여기에 느닷없이 나타나는 공장의 무더기들. 전근대·초 현대가 뒤범벅이 되어 같이 살아간다.
해질녘에「비스트리타」란 읍 정도의 마을에 드니까 광장 한 모퉁이에 장이 서있다. 옛날 서울 남대문의 도떼기시장과 아주 닮았다.
그저「토마토」여남은 개, 시금치 몇 단을 널빤지에 올려놓고 앉아있는 시골할머니, 암탉 두 마리를 묶어 땅바닥에 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젊은 농촌 아낙네 등. 재산을 몽땅 팔아봤자 노자인들 나오랴싶다. 대개가 이런 자질구레한 팔 거리로 장이 서있다.
얘길 들어보자니까 농민들이 자기 집 울타리 안팎의 개인소유 땅에서 길러낸 물건들을 이렇게 내다 팔아 살림에 보탠다는 것이다.
전 농토의 9할 이상이 국영, 또는 협동농장으로 집단화되어있는 판이라 결국 보잘것없는 사생품 장터 꼴이 좀 초라할 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마을 안의 국영이나 협동조합 경영의 장점들엔 그저 그런 대로 사먹고 몸에 걸치고 쓰고 할만한 소비재상품들이 진열돼있다. 도시나 서구같이 화려한 맛도, 풍성한 맛도 없다. 그렇다고 의식주의 최저한의 수요조차 채워주지 못할 째질 듯한 가난 이 있다는 느낌도 아니다.

<통나무 방갈로서 하룻밤>
식당도 그렇다. 횐 저고리에 때묻은 조끼, 바지는 무릎 밑에 대님을 매고 가죽을 그저 발에 말아 끈으로 동여매어 놓은 신발을 신은 이 지방 민속복장차림의 농군들이 우거지 국 같은「수프」에 맥주병을 상에 올려놓고 흥청한 술판을 벌이고 있다.
하나밖에 없는「호텔」에 방이 없어 동네청년의 안내를 받아 산비탈 과수원에 자라 잡은 「캠프」촌에 찾아들어 통나무「방갈로」에서 밤을 새운다. 산이 깊어 벌써 춥다.
배갈 같은 독주를 벗삼아 숙료를 달랜다. 하룻밤 방 값은 우리 돈으로 쳐서 약8백원. 변소·「샤워」·매점·식당·주점 등 그저 며칠동안 지내기에 아쉽잖은 시설을 갖췄다.
이와 같은「캠프」촌은 전국 어디에나 산재해있어 한여름 1∼2주일의 해방을 즐기는 휴가 족 들로 붐빈다는 것이다.

<관광 온 유고인과 조식도>
이 산 속까지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 동구사람들은 물론 서독·「프랑스」인, 하다못해 「뉴질랜드」에서 온 서구사람들까지 섞여 동서구가 휴가 족이라는 공통신분으로 혼성의 마을을 이루고 있다.
여기서도 고 성장산업으로 치닫는 관광「붐」이라는 것이 이러한 동서간 접촉을 더욱 확대자극 시킨 것, 이를테면『옆으로부터의 영향』이 갖는 의미란 간단히 무시해 버릴 수 없는 것일지 모른다.
이른 아침 진귀한 동양인과 이웃했다는 것이 퍽「영광」스러웠던지「유고」에서 왔다는 소시민형의 중년가족「캠퍼」들이 마른 돼지고기 아침식사를 함께 먹자고 청해와 한끼를 푸짐하게 때웠다. 동가식 서가숙의 신세라도 이만하면 됐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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