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의 신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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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영국의 국민학교 교과서는 첫「페어지」에서 국기의 유래를 밝히고 있다. 곧 「유니언·재크」기는 「잉글랜드」·「스코틀랜드」·「아일랜드」의 세 기가 합쳐진 것이라는 얘기가 제일 먼저 나온다. 나라의 기원에 대해서는 그저 『아득한 옛날』이라고만 적혀 있다. 연대는 말하지 않는다. 물론 신화들이 나오기도 한다.
다만 밝고 「유모러스」한 얘기들만 골라서 어린이의 정서를 풍부하게 키워내려 한다. 「이탈리아」의 교과서에는 「로마」 건국에 얽힌 신화·전설들이 푸짐하게 담겨있다. 그러나 그 서술은 『나마의 기원은 불명이며, 신화의 그늘 속에 싸여 있다』고 못박아 놓고 있다.
후세의 시인·역사가들이 나마 건국을 미화시키려고 신화를 만들어냈다. 중·고교 교과서에는 이 사실까지도 명확히 적혀있다. 따라서, 신화를 다루면서도 사실과 「픽션」과를 분간하도록 신경을 쓰고 있다. 객관적으로 역사를 보는 눈을 길러 주려는 생각에서이다. 서독의 교과서에도 신화는 많이 나온다. 다만 건국 신화보다는 민족 설화들이 더 강조되고 있다.
가령 대지의 여신 「헬다」가 봄에 금마차를 타고 지나가면 태양이 눈을 뜨고 사방이 따스해진다. 산정에 살고 있는 뇌신 「돈나」가 「해머」를 던지면 천둥소리가 나고 비가 내려 대지를 기름지게 만든다….
이런 환상적인 얘기들이 많다. 그러니까 전통적인 「게르만」인의 신앙과 결부된 신화들을 주로 다루고, 정치 색이 있는 것은 빠져있다.
소련의 역사책에는 신화의 시대가 전혀 없다. 처음부터 지주에게 맞선 농민들의 싸움얘기가 나온다. 신앙과 종교를 부정하는 소련으로서는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우리나라에는 왜 그런지 신화가 많지가 않다. 신화의 시대가 틀림없이 있었는데도 말이다.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신화의 시대란 좀 쉽게 말해서 역사가가 더듬어 볼 수 있는 이전의 시대를 말한다. 따라서 신화의 시대를 길러낸 것은 시인과 민중들의 꿈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신화의 시대가 빈곤한 것은 우리에게 선조의 마음이 그만큼 가난했던 탓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다.
『삼국유사』를 보면 그래도 우리의 신화시대는 매우 길고 풍부했던 것 같다. 신화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이다.
그런 설화들이 왜 신화의 세계로까지 승화되지 못했을까? 왜 우리에게는 단군신화 이외에는 신화다운 것이 없을까?
우리에게 신화가 없다는 것은 그만큼 어제까지의 우리네 생활이 메말라 있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우리네 마음이 윤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신화란 한두 사람의 손으로 꾸며지는 것은 아니다. 한두 해로 마련되는 것도 아니다. 신화 만은 억지로 꾸며지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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