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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역 의원은 더운 밥, 퇴역 의원은 찬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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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박성우
박성우 기자 중앙일보 기자
박성우
정치국제부문 기자

올해부터 국회의원 연금 제도가 원칙적으로 폐지된다. 지난해 7월 대한민국헌정회 육성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앞으로는 의원들의 자산 현황과 재임기간 등을 고려해 지급 여부를 결정하고, 19대 국회의원들부터는 아예 지급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모든 전직 국회의원이 매달 일률적으로 120만원의 지원금을 받아왔다.

이런 ‘특권 포기’ 정신은 새해 예산안에도 반영됐다. 전직 국회의원 모임인 ‘헌정회’에 지원되는 예산이 정부안(120억5800만원)에서 19억원 삭감됐다.

 국회가 의원연금 제도를 없애기로 했던 건 ‘단 하루만 배지를 달아도 의원들은 평생 연금을 받더라’는 비판여론에 항복한 것이었다.

 과연 국회는 특권을 포기한 걸까. 결론적으로 특권이 사라진 건 전직 의원들뿐이다. 현역 의원의 특권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여야가 동시에 약속한 세비 30% 삭감안이나 의원 겸직 금지 법안들은 지난해 연말 국회에서 논의조차 없었다. 대선 때는 모든 걸 내려놓겠다고 해놓고 말이다.

 이뿐이 아니다. 예산안을 꼼꼼히 살펴보면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새해 예산안에 현역 의원들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경비는 여러 항목에 걸쳐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교섭단체 지원 경비가 정부안에서 7200만원 증액됐고, 한·중 의회 간 정기교류 체재 지원비와 한·일 의원연맹 지원 예산도 1억원씩 늘어났다. 의원회관 유리외벽 단열공사와 강원도 고성 의정연수원 출장경비 명목으로도 각각 3억원과 6000만원이 새로 편성됐다. 이런 ‘현역 의원을 위한 증액분’을 모두 더해 보니 19억9400만원에 달했다. 헌정회 예산 삭감액(19억원)과 비슷한 금액이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예산안을 보면 국회사무처·도서관·예산처·조사처의 인건비가 각각 정부안보다 100만~900만원씩 감액됐다. 국회 IT 업무에 들어가는 정보화 예산도 8000만원 깎였다. 국회 일반직원들의 임금을 중심으로 이렇게 깎아버린 돈이 총 9600만원이었다.

 ‘헌정회 예산 삭감분(19억원)+국회 인건비 삭감분(9600만원)’이 현역 의원의 편익을 위해 늘어난 금액(19억9400만원)과 거의 일치하고 있다. 전직 의원들과 국회 사무처 직원들의 예산을 줄인 만큼 자기들 예산을 늘린 것으로 보인다.

대선 때 특권을 내려놓겠다고 한 약속은 지키는 시늉도 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국회의 특권 포기 약속은 거의 ‘보이스피싱’급이다.

박성우 정치국제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