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약 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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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1942년 11월의 한 일요일 아침. 미국 보스턴 시민들은 조간신문 1면 기사를 보고 경악한다. '어젯밤 나이트클럽 화재. 4백여명 사망'. 병원 응급실에는 화상에 따른 세균 감염으로 죽어가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다급해진 미국 정부는 군(軍)이 관리하던 비밀 약품을 투입한다. 상처를 곪게 하는 포도송이 모양의 세균(포도상구균)을 제압한 첫 항생물질, 페니실린이 참사 속에 수많은 생명을 구하는 기적을 일으키며 화려하게 등장한 것이다.

페니실린은 28년 영국에서 개발됐지만 많은 양을 공개적으로 쓴 것은 이 때가 처음이었다. 약효에 놀란 사람들은 이 약을 모든 병에 통하는 만병통치약(cure-all)으로 여겨 함부로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약에 버티는 저항균이 생기면서 페니실린의 불패 신화는 산산이 무너졌다. 더 이상 '약(藥)발'이 먹혀들지 않은 것이다.

베트남전쟁은 인류사뿐만 아니라 성병사(性病史)에도 오점을 남긴다. 군인들에게 성병이 옮는 것을 막기 위해 베트남 윤락녀들에게 페니실린을 마구 투약한 것이다.

드디어 70년대 중반 페니실린에 끄덕하지 않는 임질균 등이 생겨나 군인과 윤락녀들을 매개로 아시아와 유럽과 미국으로 퍼져나갔다. 당연히 대규모 군대를 파병 중이었던 한국에도 상륙했다.

곧 새로운 항생제(테트라사이클린)가 개발돼 페니실린 저항성 임질균을 제압하긴 했지만 그도 오래 가지는 않았다. 또 다른 종류의 저항균이 생겨난 것이다. 페니실린이 대중에 등장한 지 60년, 항생물질과 성병 사이 승패를 주고받은 끝없는 대결은 이런 식으로 계속돼 왔다.

건강보험공단의 집계 결과 최근 매독.임질 등 성병 환자가 크게 늘었다고 한다. 특히 과거 임질균에 잘 듣던 퀴놀론 계열의 약이 요즘 약발이 떨어지면서 임질 환자가 2000년 4만7천여명에서 2001년 8만2천여명으로 증가했단다. 어떤 항생물질로도 퇴치할 수 없는 성병균이 출현했다는 보고까지 있다.

역병(疫病)의 창궐은 문명의 산물이라는 견해가 있다. 십자군전쟁이 흑사병을, 르네상스가 매독을, 산업혁명이 결핵을 각각 유행시켰다는 해석이다.

향락산업이 갈수록 번창하고 성 모럴이 무너지는 요즘, 신물질 개발만으로 성병을 물리칠 수 있을까. 약발이 통하지 않는 세상이다. 신독(愼獨)할 수밖에….

이규연 사건사회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