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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4)내가아는 박헌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체포직전
정태식에게는 노모가 있었다. 누구나 어머니가 없을까마는 정태식은 어머니를 맡아 봉양해줄 사람이 없어서 대단히 애를 먹고 있었다. 정태식은 경성제대학생시절에 최모라는 부호집·딸에게 장가를 들어 아이들도 많이 두었으나 그의 처는 47년인가 48년에 불행히도 경찰차에 치여 죽어버렸었다. 장례식에 정태직이 나타날 것이라고 경찰이 대기하고 있었기때문에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하였었다. 처가 죽고나니 아이들은 외가에 맡겼으나 어머니를 보살펴 줄데가 없어서 채항석의부인 장병민이 자기의 아는 사람집에 맡겨 주었다. 가끔 정태식이 찾아가서 잠깐 만나보고 오곤하였었다.
정태식이 수도극장근처의 「아지트」에서 일단 체포되었다가 탈출하고 난 뒤로부터는 위험하여 외출을 하지않기때문에 몇달째 어머니도 가서 만나보지 못하고 있었다. 12월대목 설날이 가까와오니 정태식의 어머니가 아들얼굴을 한번 보고싶다고 자꾸 독촉해오는 것이었다. 정태식의 어머니는 70노인이라 걸음도 잘 못 걸을뿐만 아니라 노망을 하여 횡설수설 무슨소리를 중얼거려대기때문에 오라고할수도 없었다.
어느날 밤에 그 날일을 다마치고 정태식의 「아지트」를 가니 채항석부인이 정태식어머니가 자꾸 아들 정태식을 한번 만나게하여 달라고 졸라서 곤란하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문득 시골에 있는 우리어머니 생각이 났었다. 우리어머니도 70노인이었다. 47년 초봄에 하룻밤 잠깐 꿈과 같이 만나보고 2년이 되도록 만나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우리어머니의 처지를 생각하니 남의 어머니의 처지에 동정이 가서 설을 오매불망하는 아들과같이 쉬게 해주었으면하는 생각이 들었다.『어디에 계십니까? 제가가서 업고 오겠읍니다』하고 채부인과 정태식을 보고 말을 건넸다. 『김선생이 어찌?』하며 정태식은 내말에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다. 그는 나에게 미안해서 하는 말이었다.
『우리 어머니도 한번 업어드리지 못하였는데 대신으로 정선생 어머니를 한번 업어드리지요』하며 나는 선뜻 일어섰다. 정태식은 아무리 효자고 자기어머니를 업고오고 싶어도 몸이 작아서 어머니를 업고올 체력을 갖추지 못했다.
나는 채부인에게 정태식의 어머니가 있는 곳을 물어 돈암동 어느 집을 찾아갔었다. 아드님한테 가자고하니 좋아서 업히는데 마른 나무와 같이 가벼웠었다. 나의 등에 업히자 무슨 말을 하는지 혼자서 중얼중얼하며 그치지 않는 것이다.
정태식의 어머니를 무사히 정태식의 앞에까지 업어다 주자 모자가 서로 껴안고 어루만지고 있는것을 보고 나는 우리어머니의 생각을하고 울면서 돌아섰다.
l950년의 설날이 닥쳐왔다. 설이라도 어디 자유스럽게 놀러갈데도 없었다. 설날과 그이튿날은 지하당의 우리「블록」에서도 쉬게되어있었다. 모처럼 아무데도 나가지 않고 집에서 쉬고 있었다. 대문밖을 한발나서면 수색망이라 언제 무슨 사고가 발생할는지 생사를 예기치 못할지경 이어서 이틀동안 쉰다는것은 그동안만큼 생명이 연장된다는것을의미하였다. 아침밥을 먹을때는이것이 최후의 밥이라는 생각이 늘들었다. 하룻밤을 무사히 자고나면 하루낮을 무사히 지나고 집에 돌아오면 오늘도 살아있구나하는 절박한 나날이었다. 이번 설도 가족하고 멀리 떨어져 쇠는 쓸쓸한 설이었다.
나의 이러한 환경을 아는 정태식의 「레포」이가 나를 위로하여주는 마음으로 초이튿날밤에 자기집에 식사하러 오라고 초대하여 주었다. 나는 그 우정이 고마와서 그의 초청을 받기로 하였다. 날이 저물어서 약속대로 이의 집앞에가서 2층 끝방의 유리창을 쳐다보니 「램프」불이 켜져 있었다. 이것이 안전신호였다. 이의 집은 채항석의 집보다 더 큰 2층양옥집이었다.
현관에 들어서니 아래층 이의 부친방에는 초청객이 많이와 있어 이미 술잔치가 시작되어있는것 같았다. 담소하는 소리가 바깥까지 들려오고 있었다.
나는 2층의 이의 방으로 안내를 받았었다. 이는 나를 2층방으로 안내해 놓고 술상을 가지러 아래층으로 내려 갔었다. 이 집은 전에 황보와 안영달과만날때 두번 쓴일밖에 없어서 안전하다고 나는 안심을하고 앉아 있었다.
조금 있으니 이가 눈이 둥그례 가지고 뛰어 올라오면서 「큰일 났어요. 포위 당하였어요. 체포하러 와요.』떨리는 목소리로 외치는 것이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나도 모르게 일어나 뒤창문을 열고 지붕위로 뛰어오르려고 하였다.
그러나 지붕처마에 손이 닿지 않았다. 나는 마치 체포당하러 온것같이되고 말았다. 이도 마치 나를 잡히게 하기위하여 초대한 것같이 되어서 입장이 곤란함을 느꼈는지 『선생님! 선생님은 우리누이 방으로 들어가서 자형친구라 하세요. 저는 잡혀가겠어요하며 반 우는소리로 나를 아래층 자기누이방으로 밀어넣고는 문을 닫는 것이었다.
그때 수사기관사람들이 문을 열어주지 않으니 문을 차 부수고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내가 이모요』하며 이가 자진하여 나서서 수갑을 받는 것 같았다. 동시에 이의 모친의 통곡하는 울음소리가 터져 나와 온 집안이 별안간에 왈칵 뒤집히고 말았다. <계속>

<정정>
지난 7월23일자 (지방은 24일자) 본란 『내가 아는 박헌영』1백21회 말미부분(10행)에서 1948년4월 남북제정당·사회원계연석회의경과를 얘기하는 가운데 우사 김규식박사의 생애에 본의 아니게 흉된 표현을 하게된것을 전문 취소하는 바입니다. 또한 이로인해 평생 조국광복을 위해 몸바치신 고인의 애국공적과 명예에 행여 손을 끼칠까 염려되어 심심하게 사과드리으며, 결과적으로 유가족들에게도 누를 끼친것을 죄송스럽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박갑동 중앙일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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