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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제1화>선묘녀의 비련과 의상대사(2)|프롤로그-심층발굴의 의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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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지남」의 자리도 사양>
-얘기는 계속된다.
한편, 여기서 원효와 헤어지게 된 의상은 홀로 당나라에 들어가 수도하기 10년, 그 스승 지회(중국 화엄종의 2대조·600∼668)조차 가장 아끼는 고승이 되었다. 그는 죽기 전 미리 의상을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 중국화엄종을 대표할 「지남」의 자리에 앉도록 추대까지 했다.
하지만 의상은 이 영광스런 자리마저 동학인 법당(일명신수·중국화엄종의3대조·643∼712) 에게 사양하고 급거 귀국 길에 오를 것을 결심한다.
그는 비록 승려의 몸이었지만 조국의 위기를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당시 신라는 당나라의 도움으로 드디어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 날로 부강한 나라가 되어가고 있었다. 당나라는 그런데도 그 신라가 자기네의 은고를 몰라본다고 분격하고 있었다.
당나라는 신라사신 김흠순을 인질로 잡아 가두고, 불원 신라 정토군까지 보낼 계획을 짜고 있음을 알게되었으니, 그에게 있어 조국의 위기란 바로 이것을 두고 이른 것이다.
이때, 의상을 마음속에서 열렬히 사랑하고 있던 당나라 미녀선묘는 그의 옷소매를 붙잡고 눈물로써 머물러 주기를 애원한다. 그렇지만 의상은 도심과 조국의 위기를 구해야 하겠다는 생각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래서 끝내 그 뜻을 꺾을 수 없음을 깨닫게된 선묘는 의상의 뱃길을 지켜주고자 몸을 물 속에 던져 바닷 속 용이 되었다.
그림에 담겨진 얘기의 줄거리는 대체로 이런 것이다. 선묘녀에 얽힌 이러한 비련 담은 의상의 모국인 한국 땅에도 물론 전승돼 내려오건만 별로 아는 이가 적다.
태백산 험준한 산줄기를 타고 깊은 산골짜기에 있는 경북 영주땅 정석사에 가본 일이 생각난다. 이 절은 신라 문무왕 때 의상이 직접 왕명을 받아 창건한 것인데, 그 봉황산 정석사의 이름을 모를 사람은 없다. 그렇지만 이 절이 원효 창건의 경주 분황사와 함께 신라 화엄종의 2대 총본산 이라는 사실, 그리고 여기서 메아리치기 시작한 해동화엄종의 깊은 사상이 이웃 중국과 일본의 문화에까지 큰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뜻밖에 적지 않을까 싶다.
봉황산 부석사에는 지금도 고려시대에 창건된 <무량수전>·<조사당>·<비로샤나 석가여래 석탑>·<조사당벽화>·<석등>등 희한한 국보들이 수두룩하지만, 이 절에 선묘녀의 전설과 얽힌 <선묘정>과<석룡>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더군다나 적다.

<선묘정>은 이 절 승방 남쪽 삼사 십간 떨어진 계곡에 있는 석실구조의 우물이고,<석룡>은 무량수전 아래 깔린10여간 크기의 S자형으로 용을 조각한 돌 초석이다.

<선묘의 순애보에 감동>
이 절에 전하는 선묘녀에 관한 설화는<고산사회전>에 그려진 얘기와 대동소이한 것이다.. 다만, 여기서는 『송고승전』과『삼국유사』등에 적힌 의상의 속성(경주출신으로서 신라 박씨라고도 경주 김씨라고도 쓰여있다)이라든지, 입당구법의 여로에 올랐을 때의 자세한 행로, 그리고 의상이 「등주」란 항구에 살던 기청의 선묘를 만나게 된 경위 등 좀더 사실적인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자세히는 『사상계』1953년6월호 민영규 교수의 논문참조).
어느 쪽이든 일편단심, 오직 사랑하는 이를 위해 자기를 죽여·용이 됐다는 한 미인의 얘기이다. 이국의 학승 의상의 전법을 지켜주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당나라 여인 선묘의 순애보는 정녕 의상이 설파한 화엄종의 기여자체보다도 더 절실한 감동을 사람들의 마음속에 심어 놓았음이 분명하다. 일본인들은 실상 이런 전설 속의 인물을 자주자신들의 신으로 모셔 제사지내는 백성인지도 모르겠다.

<사당 앞엔 생화 한 송이>
고산사로 들어서는 입구 채 못미처 길가 언덕 위에 있는 것이 바로 그 선묘를 명신으로 모신 선묘명신 신사이다. 주산 가도(경도서북쪽을 관통하여 동해연안 무학항에 이르는 국도) 의 가파른 언덕길, 국철 「버스」「노가노오」소학교 정류장 앞에 자리잡고 있는 이 신사는 대숲에 묻힌 소사당이다.
방금 그 사당 앞에는 오늘도 사람이 다녀갔는지 한 포기 생화가 향내를 뿜고 있다. 사무소도 따로 없는 조그만 건물이지만 사전 앞 「시메나와」(주연승=신을 부르는 설렁줄)에는 매단 지 며칠 안돼 보이는 백포7∼8장이 바람에 나부끼고있다.

<교수부인도 찾아 참배>
그 맨 윗 것에는 분명히 <선묘대묘신(여기 대묘신의 「묘」자는 「명」자를 잘못 쓴 듯) 십육세 남 미국강>이라는 먹 글씨가 선명하다. 16세 난 외아들을 가진 어느 노모가 자식의 장수무병을 빌고, 선묘녀 같이 맵시 곱고 마음씨 착한 아가씨를 며느리로 맞게 해달라고 축원 드린 것이 아닐까 상상해 본다.
조금 뒤 석수원 다실 에서 만난 세 중년의 일본부인들도 그럴 것이라고 동의해준다. 대학교수부인들로 알려진 이 여인들이 고산사에 온 것은 이 절에서 여는 다회에 참석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그녀들 역시 이 선묘의 기막힌 순애보가 되어 화엄종의 신도가 되었다고 한다.
실상 본지수적설 【주=불교에서 불·보살은 중생제도를 위한 한 수단으로 현세에서는 신(명신)의 형체로 현신 한다는 설】이 뿌리 깊은 일본사회에서 민중신앙의 「심벌」은 이처럼 신도 되고, 명신도 되어 그들의 일상생활과 종교를 연결짓고 있는 것이다.
선묘를 보살로 모신 선묘신사는 주산가도초입 「우메가하마」의 민가 틈에 끼여있는, 이젠 여염집과 다를 바 없는 작은 암자이다.
이 신사가 세워지게 된 연유에도 또 하나의 감동적 에피소드가 있다.

<모성상의 극치로 승화>
고산사를 중흥시켜 일본 화엄종의 정신적 「메카」로 만든 명혜상인 얘기는 앞서도 잠깐 언급했었다. 그는 원효·의상이 편 해동화엄종의 깊은 뜻을 누구보다도 깊이 터득한 학승인데, 그의 불심을 움직이게 한 힘 역시 사실은 선묘에서 받은 강렬한 감동 때문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는 전국시대였던 당시 일본사회 상하의 신심을 한 몸에 모을 만큼 명성이 높은 승려였다.
그런 그가 이 선묘신사를 세우면서 손수 화필을 들어 불안불모상(일본국보·기장은181㎝×127㎝)울 그린 심경을 사전을 통해 살펴볼 때 뿌듯한 감동이 저절로 솟아난다.
일찍 여윈 어머니에 대한 사모의 정이 선묘를 모성상의 극치로 승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가 그린 이 불안불모상을 자세히 들어다 보라. 그 얼굴이야말로 복스럽기 이를 데 없는 선묘신상(전회사진 참조)의 모습을 빼낸 듯이 옮겨 놓고 있지 아니한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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