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한빛부대장 직접 전화" 한국 "그런 일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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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남수단에서 발생한 쿠데타가 한국과 일본 간 진실공방으로 확산되고 있다. 한국군 파병부대인 한빛부대가 일본 육상자위대 파병부대로부터 실탄 1만 발을 빌린 게 발단이 됐다. 일본 정부가 이를 ‘적극적 평화주의’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계기가 됐다고 정치적 의미를 부여하면서 한·일 간, 국내적으론 여야 간 공방이 거세지고 있다.

 공방의 핵심은 두 가지다. 먼저 한국군이 일본 자위대에 실탄 지원을 직접 요청했느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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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빛부대는 파병된 보르 지역이 반군들에 접수되며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가자 실탄 확보에 나섰고, 우리 장병들이 보유한 소총(K-2)과 같은 5.56㎜ 실탄을 사용하는 일본 자위대로부터 긴급 지원을 받았다. 이에 대해 일본은 한빛부대장인 고동준 대령이 직접 일본군에 전화를 걸어와 긴급 지원을 요청했다고 주장한다. 오노데라 이쓰노리 일본 방위상은 지난 24일 직접 NHK TV에 나와 이 같은 내용을 전하며 당일 밤 나눴던 일본 자위대 현지 지휘관과의 화상회의 동영상을 공개했다. “한국군 대령이 보르 야영지에 1만5000명의 피란민이 있는데 보르를 지키는 부대는 한국군뿐이며 주변은 적 투성이”라고 호소하며 절박하게 지원을 요청했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국방부의 주장은 다르다. 고동준 대령의 실탄 지원 요청은 없었다고 반박했다. 김민석 국방부 대변인은 25일 “현지 지휘관의 판단에 따라 유엔남수단임무단(UNMISS)에 요청했지만 UNMISS는 한국군이 사용하는 실탄이 없다며 일본 측을 주선해 줘 지원받게 됐다”면서 “이 과정에서 실무자가 일본 자위대 실무자와 협의를 하기는 했지만 고 대령이 직접 전화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양측의 주장이 완전히 엇갈리는 대목이다.

 유엔이 실탄 지원을 주선했는지를 놓고도 양측은 입장 차를 보이고 있다. 일본 정부 대변인인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지난 24일 “일본 정부는 유엔에서 정식 요청을, 한국에선 요청을 받았다”며 “이는 모두 사실”이라고 밝혔다. 다소 어정쩡한 입장이다. 일본 언론들은 “현지 부대에 (한국 측으로부터) 직접 요청이 왔지만 법적인 근거가 없어 유엔을 사이에 끼워 전달하는 형식을 취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한·일 간 상호군수지원협정(ACSA)을 맺지 않아 직접 지원이 어렵게 되자 유엔을 내세웠다는 얘기다. 한국 정부의 결정에 의해 지원이 이뤄진 것이란 주장이다.

 국방부는 파병국을 통제하는 유엔군의 지시에 따른 것이란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일본이 우리와 같은 탄종을 쓰고 있어 일본의 도움을 받은 것일 뿐인데 일본이 이것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반박이다. 국방부 당국자는 “일본 측의 실탄을 유엔군이 옮겨왔다”며 “한국에서 실탄을 현지로 보내면 유엔에 반환키로 한 것도 일본이 아닌 유엔에서 지원받았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도 25일 “기술인력으로 짜인 한빛부대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한 조치로서 적절하다고 생각한다”며 “실탄 지원에 대한 조치는 별문제 없다”고 밝혔다.

 실탄 지원 불똥이 25일엔 여의도 정치권으로 옮겨붙었다. 새누리당 유일호 대변인은 “한빛부대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취한 적절한 조치였다”면서도 “혹시 대비태세에 허점이 없었는지 앞으로는 허점이 없는지 꼼꼼히 따지고 만전을 기해야 할 것”이라고 논평했다.

반면 민주당은 정부를 비판했다. 김한길 대표는 “남수단에 파견된 한빛부대가 다른 나라도 아닌 일본으로부터 실탄 지원을 받은 것은 우리 외교·국방의 수준을 의심케 하는 일”이라며 “일본의 적극적 평화주의나 집단적 자위권에 대해 반대하는 말도 제대로 못하는 우리 정부가 일본의 군사대국화 경향을 합리화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고 비난했다.

 이런 가운데 국방부의 늑장대응과 판단 미숙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국방부는 22일 현지로부터 실탄지원 요청을 받고 김관진 장관 주재로 회의를 열어 실탄 지원을 결정했다. 하지만 현지에선 일본으로부터 실탄을 지원받는 일이 벌어질 정도로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갔지만 “특이한 상황이 없다”는 판단을 해 안이한 대응을 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더욱이 23일 일본 정부의 지원 결정이 나오기도 전 NHK를 통해 ‘한국군에 실탄 지원’ 보도가 나가는 등 정치적으로 이용될 기미가 있었는데도 기민하게 대처하지 못했다. 일본 장관들이 동영상을 공개하자 뒤늦게 대응책을 마련하는 모습을 보였다. 쿠데타가 지난 15일 발생했지만 사태를 관망하다 일본에 손을 벌리게 되는 상황에 몰리게 된 것은 군의 안이한 상황 인식과 함께 전략적 판단이 미흡했던 것 아니냐는 지적이다.

 ◆한빛부대 인근 박격포탄 떨어져=남수단 정부군과 반군이 교전을 벌이는 과정에선 박격포탄이 한빛부대 인근에 떨어져 한때 우리 군이 대피하는 일도 벌어졌다. 포탄은 24일 밤 2발, 25일 낮 1발이 떨어졌지만 우리 군은 직접적 피해를 보진 않았다. 합참 관계자는 “정부군과 반군들이 한빛부대 울타리 옆 도로를 이동하며 교전을 했지만 한빛부대를 위협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정용수·이윤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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