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제물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인천의 내항 부두가 1일부터 폐쇄되었다. 인천의 개항을 1883년1월부터라 친다면 90년만에 있는 일이다.
인천은 예부터 있었다. 물론 이름은 달랐다. 얘기는 백제의 건국 초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동국 여지승람에 보면 주무에는 비류·온조의 두 아들이 있었다. 온조는 부여에 가서 나라를 세웠는데 비류는 신하들 말을 듣지 않고 미추홀 (미수골_에 갔다.
그러나 미추홀은 『토지가 습하고 물이 급히 멸했다』 하는 수 없이 미추홀은 자살하고 말았다.
미추홀은 매소홀이라고도 했다. 그게 바로 제물포였다. 「제」는「대」의 뜻이며 「물포」 는 「포」, 일설로는 또 제는「간」, 물은 「물」 (수) 을 뜻했다. 그러니까 예부터 제물포는 조수의 간만이 심한 곳으로 알려졌던 모양이다.
고려 인종 때에는 인주라 불렸다. 그후 경원이라 불렀고 이조 태종 13년에 이르러 인천이 되었다.
제물포가 국제적인 각광을 받게 되기는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묘를 도굴한 「오페르트」가 지나간 1866년부터였다. 이래 그는 월미도를 우현으로 바라보며 작약도를 거쳐 강화도에 이르렀다.
그런지 두어 달 후에 「프랑스」의 「로즈」 제독이 이끈 「프랑스」 함대가 작약도에 투묘한 다음에 그들은 월미도를 「로즈」 도라 명명했다.
1883년에 체결된 한·영 조약에 보면 제물포는 그대로 CHEAMULPO라 적혀 있지만 인천은 JENCHUAN으로 되어 있다.
이보다 반년 전에 한·미 조약이 체결된 것도 인천에서 였다. 한편 일본인이 서해안 중에서 인천을 개항하기로 한 것은 화방의 질 공사 때문이었다.
그는 목포·군산·아산만 등을 조사하였다. 당초에는 아산만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1881년에 이르러 인천으로 결정했다. 뭣 보다도 서울에서 가장 가깝다는 것이 이유였다.
기록으로는 인천의 개항은 1883년부터 였다. 그러나 개항 후 처음으로 들어온 배가 무엇이었는지에 기록은 전혀 없다.
같은 해 4월에 삼촌 일본 부영사가 보낸 편지를 보면-.
『본년 1월 이내 상항의 경황에는 별로 이상 없음…. 상품의 수출입은 일절 없음….』
이때까지만 해도 한옥이 10여호 밖에 없는 한촌이었다. 그렇던 인천항의 출입 화물량이 1918년에는 40만t으로, 출입 선박 척수도 3백50척으로 급증했다.
그것은 뭣 보다도 1911년에 기공된 축항 공사가 대충 끝났기 때문이었다.
10년이 걸려 끝난 동 공사는 내항과 외항을 합해 2백만명에 걸친 것이었다. 이중 갑문식의 「도크」도 이때 만들어졌다.
이게 없었다면 30척이나 되는 간만의 차로 인해 1개월에 20일, 하루 4시간밖에 화물양륙을 할 수 없는 인천항의 명맥은 더욱 짧았을 것이다. 그 후에도 여러 번 축항 공사는 있었다.
그러나 보다 더 철저한 손질이 필요해진 것이다. 그러니 조금도 애석한 일은 아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