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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의조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한국 철학의 새로운 방향』을 주제로 다룬 한 「세미나」가 있었다. 신문에 단편적으로 소개된 주제들중에 「철학의 보편성」·「역사적 특수성」이라는 말이 눈에 띈다. 시정인은 그 학문적 전개까지 귀담아 들을 형편은 못되지만, 보편성이니 특수성이니 하는말은 잠시 흥미를 끈다.
이른바 개별성(Einzelheit)·특수성(Das Besondere)·보편성(Das Allgemeine)이라는 말들은 논리학에서 한 두름에 묶여 있는 용어다. 모든 논리적 사유는 이것들이 한묶음이 되어, 그 기반 위에서 전개된다.
가령 『나는 한국인으로서 한국의 발전을 위해 성실히 일한 보람으로 결국 세계평화에 기여하고 싶다』고 생각해 보자. 이것은 『나』라는 「개별」이 『한국인』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이해하고, 또 결국은 성실한 한국인이 되어 『인류』또는 『세계』라는 「보편」에 기여하게 된다는 뜻이다.
「논리학」에선 사성 또는 사유의 법칙을 연구한다. 사람은 어떻게 해야만 오류에 빠지지 않으며, 올바른 사유를 진행할 수 있는가, 그리하여 진정한 지식을 얻기위해 어떤 법칙과 형식을 지켜야하는가. 이런 사유의 규범에 논리학은 해답을 주려고 한다. 이것은 하나의 일반적 개념에 지나지 않는 얘기이다.
여하튼 새삼스럽게 이런 문제들을 화제로 삼는 것은 우리 일상의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논리의 부재」현상들 때문이다. 어제의 논리가 오늘엔 혼란에 빠지고, 또 오늘의 신념은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른다면, 그야말로 철학도, 논리도 없는 비논리적 상황이 되고 만다. 사추작용이 비논리적일 때, 그것을 두고 인간의 상황이라고는 말할수 없다. 이런 경우는 정치·경제·사회·문화등 어느 분야를 가릴 것 없이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일들이다.
가령 「특수」나 「보편」이 무시되고 「개별」만이 존중되는 사회에선 모든일이 실험제1주의가 되기쉽다. 또 조그만 문제들에 매달려 아둥바둥하는 경우도 있다. 반대로 「개별성」만 무시된 논리도 허황되다. 주체가 없기 때문이다. 이 세가지가 조화를 이룰때 논리는 정연해 진다.
정책가들이 허둥지둥 대는 것은 그런 논리에 대한 확신이나 철학이 없기 때문이다. 『철인이 우두머리이며, 우두머리가 철인인 국가는행복하다』고 갈파한 「플라론」의 말은 새겨들을만하다.
역시 한 개인의 경우도 그렇다. 자신의 생에 대한 확신이나 신념이 없을때 그는 종잡을 수 없이 맹랑한 나날을 살아가게 된다. 세상에 목적이 없는 시간이나 공간은 얼마나 적막한가. 국가도, 사회도, 개인도 개별적·특수적·보편적인 사유의 기반위에 있을때 믿음직스럽고, 행복한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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