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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장수술 1500만원, 보험 대란 온다 … 의료 괴담 난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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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지난 15일 대한의사협회 주최로 서울 여의도공원에서 열린 ‘전국의사궐기대회’에서 회원들이 포클레인을 동원해 원격진료 반대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뉴시스]

정부가 원격의료 도입과 의료법인의 자(子)회사 허용 계획을 발표한 이후 의료 민영화 괴담이 급속히 번지고 있다. “의료 민영화가 아니다”라는 정부 설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확산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번지는 대표적인 괴담은 ‘의료 민영화가 되면 병원 진료비가 치솟아 제대로 진료를 받지 못하고 거대 자본이 병원을 장악한다’는 것이다. 더 구체적인 괴담도 있다. 제왕절개 수술의 경우 한국은 199만원, 미국은 1996만원, 맹장수술은 한국은 221만원, 미국은 1513만원이라는 것이다. 이대로 가면 한국이 미국처럼 돼 맹장수술을 받지 못하게 될 거라는 얘기다. 의료 사각지대에 놓인 미국인의 이야기를 다룬 마이클 무어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식코’가 현실이 된다는 것이다. 2008년 광우병 파동 당시의 상황이 재연되는 듯하다. 청와대 최원영 고용복지수석과 이영찬 복지부 차관이 나서 “원격의료는 민영화가 아니다” “영리병원을 허용할 뜻이 없다”고 진화에 나섰지만 논란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회원 수가 200만 명이 넘는 국내 최대 육아정보 카페에 연일 의료 민영화 관련 글이 올라온다. 한 회원은 “정부의 방침대로라면 의료 민영화는 통과된 거나 마찬가지다. 진료비가 엄청나게 올라 간단한 치료도 못해 죽는 사람도 나올 것”이라는 글을 올렸다. 또 다른 회원은 “저는 둘째를 낳지 않겠습니다”는 글을 올렸다. “의료 민영화로 제왕절개 비용이 치솟을 것”이란 게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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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에는 의료 민영화를 미끼로 일부 보험설계사들이 피싱 문자메시지를 돌리고 있다. 일부 보험설계사는 “정부가 의료 민영화를 추진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보험료가 올라 실손보험 가입이 하늘의 별 따기가 되니 지금 가입해야 한다”고 권유하고 있다.

 의료 민영화 괴담은 지난 15일 대한의사협회가 여의도 집회를 한 이후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 본격적으로 번지고 있다. 당시 의협은 의료법인의 자회사 허용과 관련해 “의료기관이 진료가 아닌 부대사업으로 돈벌이에 나서라는 기형적인 제도”라며 “영리병원 도입의 전 단계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노환규 의협 회장은 18일 기자회견을 하고 “15일 집회에서 의료 민영화란 단어를 사용한 적이 없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노 회장은 “일반 국민은 의료기관이 이윤의 극대화를 추구하게 하는 영리병원 도입이 의료 민영화라고 생각한다”며 “그런 의미라면 우리는 의료 민영화에 반대하는 게 맞다”고 말했다.

 인터넷 공간의 의료 민영화는 의료법인의 자회사 설립 허용을 두고 나온 말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정말 SNS 등에서 제기되는 우려처럼 의료법인의 자회사 허용이 의료 민영화로 이어질까. 정부는 의료법인이 자회사를 만들어 숙박·여행·건강식품 판매 등 다양한 사업을 할 수 있게 길을 열어주기로 했다. 지분을 30%로 제한하고 수익의 80% 이상을 환자 진료에 쓰도록 제한한다.

 하지만 현재 의료법인이 아닌 학교법인(세브란스병원)이나 특수법인(서울대병원) 병원은 이미 자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서울대병원의 헬스커넥트(모바일 건강관리)와 세브란스병원의 안연케어(의약품도매)가 대표적이다. 헬스커넥트의 대표를 맡고 있는 이철희 분당서울대병원장은 “자회사가 만들어져도 자본이 병원에 직접 투자는 할 수 없다”며 “건강보험 체계가 무너지고 정부가 현행 의료법을 뿌리부터 바꿔버리지 않는 이상 영리병원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복지부 권덕철 보건의료정책관도 “서울대병원이나 세브란스병원이 자회사를 운영한다고 영리병원이라고 할 수 없지 않으냐. 이 병원들이 자회사를 만들고 나서 달라진 것이 없다”고 설명했다. 권 정책관은 “건강보험 체계가 무너질 경우나 의료 민영화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현행법으로도 다양한 병원 설립 주체 중 학교·특수·사회복지·사단·재단법인 등은 자회사를 둘 수 있다. 개인병원은 말할 것도 없다. 의료법인만 설립이 안 되게 돼 있다. 의료법인은 대부분 중소병원들이다. 큰 병원 중에는 가천길병원과 차병원, 강북삼성병원 정도다. 세브란스나 서울대병원 같은 덩치 큰 병원들에는 자회사가 허용돼 있는데 중소병원은 길이 막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의료법인 형태의 중소병원들이 “의료법인만 자회사를 세울 수 없는 게 형평성에 안 맞다”고 주장해 왔고 이 주장을 받아들여 이번에 법 개정을 추진하게 됐다.

 을지재단에서 설립한 의료법인 을지병원은 재단 내 학교법인인 을지대학교와 함께 기능성 화장품을 개발해 온라인 등을 통해 판매하고 있다. 판매 수익은 을지병원이 아닌 을지대학교의 몫이다. 관련 법에 가로막혀 의료법인인 을지병원이 직접 화장품 개발이나 판매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을지재단 최헌호 운영본부장은 “병원이 전문성을 살려 주도적으로 이 같은 사업을 벌인다면 의료기술 발전이나 일자리 창출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의료법인인 가천길병원의 이정미 홍보팀장은 “현재 구체적으로 정해놓은 사업계획은 없다. 뭘 할 수 있을지 검토에 들어간 수준”이라고 말했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그동안 정부나 정치권에서 신뢰를 주지 못했기 때문에 아무리 ‘아니다’고 해도 사람들은 루머나 다른 정보에 더욱 신뢰를 갖게 된 것”이라며 “지금 인터넷과 SNS에는 너무 많은 정보가 돌아다니면서 점점 불안정한 사회가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장주영·김혜미·이서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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