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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2)<제31화>내가아는 박헌영(10) 박갑동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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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이르쿠츠크파
동부「시베리아」에서 이동휘가 한인 사회당을 만든 것 보다 몇달앞서 1918년 1월21일「이르쿠츠크」를 중심으로 「바이칼」호 서쪽지역에 거주하던 한인들은 「러시아」「이르쿠츠크」공산당의 한인지부를 결성했다.
이 지역의 한인들은 거의 모두가 「러시아」에 귀화, 이미 그 생활과 문물에 익숙돼 있을 뿐 아니라 「볼셰비키」지배하에서 어느정도 편들고 있었다.
이들은 적군에 옹소, 백군과의 전투에 가담하기도 했으며 이 댓가로 그해 9월 「이르쿠츠크」공산당의 지도자인 「보리스·스미야스키」의 후원으로 전노한인공산당을 조직, 「러시아」공산당에서 딴 살림을 차려나오게 되었다.
「시베리아」에 있던 이동휘는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기회에 대대적인 독립운동을 벌일 생각으로 「레닌」의 원조를 얻기위해 박광순 등을「모스크바」로 보냈다.
박찬순은 늦은 봄 「모스크바」에 도착, 「코민데른」으로부터 운동자금을 받아 그해 8월 극동으로 향했다.
때마침 박일행이 도중에 「이르쿠츠크」에 도착하자 전노한인공산당을 조직해놓고 있던 김철동 이재복 한명서 등은 「코민테른」의 공금은 당연히 자기들이 써야한다고 주장하면서 이불을 협박, 돈을 빼앗아 박은빈 손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때부터 두파벌의 재노한인 공산당간에는 싸움을 벌이게됐다.
「이르쿠츠크」측 공산당은 청년들에게 공산주의 교육을 적극적으로 시키고 경세광이라는 기관지까지 만들어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는 등 「볼셰비키」정책을 침투시키는데 급급했다.
이동휘파에 대항하기 위해서 실력을 쌓고「모스크바」본부로부터 정봉성울 신임받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한발앞서 이동휘는 「시베리아」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자파를 몰고 상해에 가 l921년 l월10일자로 이른바 상해파 고려 공산당을 조직했다.
그리고 「코민데른」본부로부터 유일정통성의 고려공산당임을 확인받기 위해 이동휘 자신이 통역으로 이극노(현북한조국간화통일 위원회 위원장)를 대동하고 상해를 떠나 배편으로「유럽」을 경유, 부랴부랴 「모스크바」로 떠났다.
상해파 고려 공산당이 조직되자 다섯달 뒤늦게 「이르쿠츠크」파 사람들은 l921년 5월4일부터 17일까지 거의 보름동안에 걸쳐 소위 「이르쿠츠크」에서의 한인 공산주의자 대회를 열고 중앙집행위원을 구성했다.
이때의 중앙집행위원은 안병찬 한명서 남만춘 한규선 이재복 등이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상해의 고려공산당파·공산주의 운동의 주도권을 놓고 서로 치열히 다투게 되었다.
「이르쿠츠크」에서 전노고려 공산당이 한인공산주의자 대회를 열자 상해에서는 안병찬이 대표로 참석해 대회의 회장이 되었다.
안병찬 역시 평북의주 사람으로 본래 변호사 출신의 민족주의자였다.
3·1운동 당시 서울에서 활약하던 학생들이 그해 4월 남만주의 안동현에서 대한독립 청년단을 조직했을 때 그는 총재로 추대되기도 했고 그해 11월엔 남만주 관전현에서 조직된 대한 청년단 연합회 총재가 되어 국내에 김상옥 등 공작원을 보내 독립운동에 힘쓴 사람이다.
이에 앞서부터 두 파 사이의 주도권싸움이 치열해진 가운데 큰 말썽이 하나 생겼다.
「코민데른」2차대회가 있을즈음 임시정부에서는 「레닌」정부에 원조를 청하기 위해 한형권이란 사람을 「모스크바」로 보냈다.
한은 그때 2백만「루불」의 자금을 얻기로 약속받고 외교인민의원 「치체린」으로부터 우선 60만「루블」어치인 금괴를 받아 2O만「루불」을 예치한 뒤 나머지 40만「루를」을 갖고 돌아왔다.
그런데 이 자금이 임시정부에 들어가야 하는 돈인지 공산당에 가야하는지에 대해 말썽이 된 것이다.
한이 임시정부 대표로 갔었기 때문에 이자금은 당연히 임시정부에 돌아갈 것이겠지만 이동휘는 선수를 써서 교묘한 방법으로 그 자금을 그의 심복인 금립을 시켜 가로챘다.
그러나 금립은 자신이 돈을갖고 있음을 틈타 그 돈으로 간도에 농장을 마련하고 상해에서는 중국인첩과 호의호식을 깼다는 혐의로 동료들로부터 심한 공격을 받다가 끝내는 암살당하고 말았다.
이 책임을 지고 이동휘도 임시정부의 국무 총리직을 내던졌다.
이동휘는 이돈의 일부를 당시 국내에 있던 장덕수에게 몰래 건네주었다.
그러나 국내에 들어온 돈온 이가 당초 바란대로 공산주의 선전이나 문화운동에는 쓰여지지 않고 국내일부 민족운동자와 문화 운동자들의 용돈으로 써져버렸다.
「시베리아」에 있을때부터의 이의 유력한 협력자였던 김만경은 이같은 자금부정사건에 크게 실망한 나머지 불만을 품고 이탈, 「이르쿠츠크」공산당에 가담해 버린다.
김만겸은 상해에 내려온 뒤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상해지부를 조직하는 한편 사회과학연구소를 차리고 공산주의 운동을 폈다.
내가 여기서 얘기하는 박혜영은 바로 상해에 가자마자 김만경의 문하에 들게된다.
따라서 박총영은 초기 공산주의 운동에 있어 두파로 갈라져 싸움질했던 상해파 고려공산당(이동휘파)과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김철동파) 중 계보로 따져 「이르쿠츠크」파에 들게된다.<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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