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기쁨과 안식의 화가 『르노아르』회고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피에르·오귀스트·르노아르」의 회고전이 3일∼4월1일 미국 「시카고」 미술 연구소에서 열리고 있다.
「시카고」 미술 연구소가 근년에 마련한 전시회 가운데서 가장 기대를 건 이「르노아르」 회고전은 89점의 작품을 빌어 온 대여전.
1862년에서부터 1919년, 그가 세상을 떠난 1919년까지의 작품들이 망라되었다.
「마네」로부터 배운 날카로운 기법을 엿보여 주는 27세 때의 작품 『광대』가 한쪽 끝에 있는가 하면 다른 편엔 반고전적이고 원숙한 화법을 구사한 1911년작 『목동 「알렉산더·투르니센」』이 전시됐다.
물론 이 사이에 전시된 것은 「르노아르」의 주제가 되었던 여인화들이다.
19세기 화가로서 「드라크로와」를 제외하면 「르노아르」만큼 인상적인 여인상을 현대에 전한 이는 없다.
그의 작품이 일반성이 있었다는 이유에서 뿐 아니라 그가 가장 즐기던 소재 곧 나체화에 대한 그의 유별난 감각 때문이기도 하다. 「르노아르」에 비하면 「피카소」까지도 「페미니스트」라 할 수 있을 정도.
그의 여성관은 옛적 농가의 가장 같은 고루성을 가진 것이다. 『저작·법률·정치에 종사하는 여인은 괴물이다. 예술가라는 여인도 순전히 웃음거리다. 아름다움 이야말로 여성의 영역이며 의무이기도 하다』라고 1888년엔 쓰고 있다.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를 그의 여인상들에서는 엿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초상들에선 역시 어떤 심리학적인 깊이가 없는 흠이 있다. 또 「드가」 「쿠르베」에 비해 사회성이 미약한 그림들이라 할 수 있다. 「세잔」처럼 뒷시대의 화가들에게 유익한 어떤 것도 넘겨주지 못했다.
이런 그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는 뛰어난 화가였다.
그의 세계가 고립적인 것이고 그의 여성관이 원시적인 것이었다는 사실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예술가는 역시 그의 목적에 의해 평가돼야 할 것 같다.
이는 기쁨과 안식의 세계를 만들기를 원했던 것이다. 「마피스」의 『피곤한 실업가를 위한 안락 의자』와 같은 기쁨과 안식을 마련함에 있어 그는 성공했던 것이다.
「메테르니히」가 『혁명 전에 살지 못한 사람은 생활의 감미로움을 알 수 없다』고 했던 것처럼 「르노아르」의 정신적 고향은 1789년 「프랑스」 혁명 전에 이루어진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꽃다발이 있는 정물』 (1871년)이나 『「피아노」앞의 두 소녀』 (1889년) 등 초기·말기를 통틀어 「르노아르」의 고향은 역시 기쁨과 안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타임지서>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