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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그 애환을 되새겨보는 특별기획|고달팠던 나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한국의 첫 번째 「하와이」이민이 정착한 모쿠리어 농장은 하와이 제도의 중심인 오아휴섬 서북쪽 끝에 위치해 있었다.
막상 자리를 잡은 농장은 말뿐이었고 진흙탕과 원시 잡목으로 뒤덮여 있었다. 말이 농업이민이었지 완전히 새로 농토를 개간해야만 했다.
관개시설을 새로 만들어야 했고 하루 한차례 지나가는 「스쿨」이 있었을 뿐 온종일 뙤약볕 아래서 당초 계약대로 하루 10시간씩 중노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 계약을 어기지 않기 위해서는 꼭두새벽에 일어나 저녁때까지 세끼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 온종일 밭에 매달려 있어야 했다.
첫 이민에 이어 그후 1905년 을사보호조약으로 이민이 일시 중단될 때까지 「하와이」에 건너간 한국민은 똑같은 고생을 감수해야만 했다.
초기의 한국이민의 성분을 보면 교인들과 공부를 목적으로 건너간 학생과 시골선비, 그리고 막벌이 하는 일꾼, 시골머슴 또는 할 일없이 떠돌던 건달 등이 뒤섞여 있었다. 따라서 그들의 교육정도는 65%가 문맹이었고 이민을 가게 된 동기는 대부분 일제의 침략과 압박으로 인해 생활이 곤란하거나 정치적으로 고통을 받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국내에서 어떻게 생활했든간에 계약에 의해 건너온 농업이민이었기 때문에 누구나 할 것 없이 낮이면 사탕수수 밭에서 일하고 밤이면 움막 같은 집에서 피곤한 몸을 달래었다.
한국이민은 농장노동 이외엔 달리 생활방도가 없었다. 다른 나라 사람처럼 본국정부의 지도나 후원도 없었고 거기다 외국인에 대한 차별대우 때문에 타국 이민 보다 고생이 몇 배나 더 심했지만 나라 잃은 한탄으로 나날을 지낼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망국의 한숨과 눈물 속에서 겪은 고생이 재미한인 사회건설과 조국광복 운동의 밑거름이 됐다.
하와이 첫 이민이 있은지 6년 후인 1910년 「대한인국민회」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그동안 귀국한 사람이 9백83명(남자 9백64명·여자 19명), 미국 본토로 이주한 사람 2천11명(남자 1천9백99명·여자 12명), 죽은 사람이 45명으로 재「하와이」동포 수는 모두 4천1백87명, 그동안 「하와이」에서 출생한 2세는 1백7명이었고 이즈음에는 자작농을 갖고 있는 사람과 농장 일을 그만두고 사업으로 생업을 바꾼 사람이 상당수에 달해 생활도 어느 정도 안정되기 시작했다.
한동안 중단됐던 「하와이」 이민은 1910년 한·일 합방이 이루어진 후 다시 시작됐다. 이때의 이민 중에는 망국의 설움을 달래며 일제의 탄압을 피해야 했던 애국지사와 함경도 지방의 광부들이 많았고 그중에는 30대의 광부들도 더러 있었다. 이들도 초기에 이민간 사람들과 고생은 마찬가지였다. 임금이나 노동시간도 초기와 거의 마찬가지였고 더구나 밤중에만 몸을 쉴 수 있는 움막같은 집이 노장과 멀리 떨어져 있고 교통편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새벽 2시에 일어나야 겨우 작업시간에 맞출 수 있었다.
특히 손수 밥을 지어야 했던 부인들의 경우는 남자들보다 1시간은 더 일찍 일어나야 했기 때문에 그 고달픔이란 이루 다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1903년부터 6년간 하와이 한인들은 대부분이 사탕수수나 파이내플 농장에서 일했는데 극히 일부는 이민국이나, 농장에서 통역이나, 교회 등에서 일했다. 농장 노동자의 경우 초기에는 임금이 일당 70센트였으나 1909년부터 6년간은 품삯이 75센트로 올랐고 소작농을 하는 사람도 약간씩 생겼다.
이 기간 중 사탕수수나 파이내플 농장을 자작 혹은 소작하는 동포가 25명이 있고 도시에는 채소상, 재봉소, 여관업 등을 하는 사람도 생겨났다(김원용 저, 재미한인 50년사).
이같은 고생 끝에 생활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 혼자 이민은 남자들은 가정을 꾸려 나갈 부인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외국인에 대한 차별과 멸시에 현지 백인과의 결혼은 어려웠다.
그래서 사진결혼이란 풍습이 생겼다. 하와이나 양가에 이민간 남자가 본국에 있는 처녀에게 사진을 보내 선은 보인 후 데려다가 결혼을 했다. 이 혼인방식은 한국인 뿐만 아니라 미국과 하와이에 이민간 중국인·일본인 등 동양 사람들이 대부분 그러했다.
하와이 등 미주에 이민간 동양인들은 대부분 홀아비가 많았고 몇 해나 계속되는 합숙생활에 진저리가 날 수밖에 없었다. 남자들만의 합숙 생활이라 노름이나 술타령이 많았고 그러다가 툭하면 싸움이 일어나곤 했던 것이다.
이런 합숙생활의 폐단 때문에 하와이 사회에서도 이들의 결혼과 가정생활은 장려하게 됐다.
사진결혼을 장려하게 된 것은 현지의 인종차별에도 원인이 있었지만 동양 사람들도 백인 여자와 결혼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국 정부에서 결혼을 위해 들어오는 동양 여자들의 입국을 허락했고 영주권을 주는 등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사진결혼은 1910년11월28일 하와이에 들어온 최「사라」로부터 시작되어 1924년10월까지 하와이에 9백51명, 미국 본토에 1백15명에 달했다. 【하와이=박정수 특파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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