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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는 날까지 꽃자리 찾아 예술인들 후원자로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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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77세에 충무아트홀 CEO에 취임, 퇴임을 6개월여 남긴 이종덕 사장은 “요새도 여기저기서 와 달라고 찾으니 내 인생 무대는 막 구분도 없고 전후반도 없는 셈”이라 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예술의전당 사장, 세종문화회관 사장, 성남아트센터 사장….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공연장을 두루 꿰찬 이력서는 화려하면서도 땀내가 진동한다. 1963년 문화공보부 예술과 공무원으로 시작해 50년을 예술 행정가로 살아온 이종덕(78) 충무아트홀 사장은 “내 삶은 무대 뒤에서 이루어졌다”고 요약한다.

 “예술 경영은 예술과 예술인을 위해 존재합니다. 막이 올라가고 예술작품이 환호를 받을 때면 자취도 없이 사라지죠. 배우가 앞 광대라면 우린 뒷 광대인 셈입니다. 예술가들이 창작 혼을 불태울 수 있는 마당을 잘 꾸려주는 것, 그것도 예술가와 작품 속에 스민 예술의 일부입니다.”

 이종덕 사장은 한국 예술 경영인 1세대로 꼽힌다. 예술 행정, 예술 경영이란 말조차 생소하던 1970년대부터 이 분야에 눈떠 홀로 공부하고 후배들을 키웠다. 예술 행정 분야에서 손꼽는 재목들이 이 사장 밑에서 경력을 쌓고 적절한 자리를 찾아 전문가로 거듭났다. 김의준 국립오페라단 예술감독, 박인건 KBS교향악단 사장, 안호상 국립중앙극장장, 노재천 안양문화예술재단 대표, 김승업 영화의전당 대표, 이창기 강동아트센터 극장장, 고희경 홍익대 공연예술대학원 교수, 고(故) 김주호 롯데홀 대표…. 이들이 이 선배의 문화예술경영 50주년을 기리는 잔치를 준비하고 있다. 내년 1월 21일 세종홀에서 열리는 헌정출판기념회다.

 “팔순이 가까워 한평생을 돌아보니 한길을 걸어온 사람들이 옆에 그들먹해요. 그리 밑진 장사는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배우 박정자씨가 저더러 이 시대의 마지막 로맨티스트라 하는데 모든 예술인들의 가장 열렬한 팬이라는 점에서 낭만주의자의 자격은 있죠. 문화 일꾼으로 늙은 저를 기억해주는 이들이 책을 만들어준다니 황홀합니다.”

 최근 국립발레단 단장으로 내정된 발레리나 강수진씨는 “후에 자서전을 쓰게 된다면 그 책의 한 페이지는 한국에서 만난 한 예술 행정가, 예술 CEO 이종덕의 숨은 노력과 성공 사례에 대해 기록하게 될 것”이라는 인사말을 보내왔다. 지휘자 정명훈 서울시향 예술감독은 “1974년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 피아노 부문에서 1위 없는 2위에 입상했을 때 김포공항에서 광화문까지 카퍼레이드로 축하해 세계무대에서 주눅 들지 않는 용기를 주신 분”이라고 그의 인간미를 기억했다.

 50년 동지이자 친구인 김동호 문화융성위원회 위원장은 “향이 그윽한 꽃을 피운 난초 같은 이 사장에게 단국대가 명예박사학위를 준 건 한국 공연 예술계의 명예”라고 기뻐했다.

 “밑바닥부터 긁으면서 문화 행정의 꼭대기까지 올라왔지만 어느 자리에 가건 늘 새로 시작하는 마음이었죠. 돌아가신 구상 시인이 제게 주신 시심(詩心)이랄까요.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이 사장은 “죽는 날까지 꽃자리를 찾아 예술인들의 후원자로, 사람 키우는 기쁨에 젖어 살겠다”고 했다. 은퇴 없는 영원한 현역으로 한국 문화의 첫째 뒷 광대를 자임하는 그가 팔순 이후에 풍길 그윽한 향내가 궁금하다.

글=정재숙 문화전문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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