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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8)피 어린 산과 언덕(2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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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51년1월 중공군의 개입으로 아군의 방어선이 평택동북방으로부터 원주까지 일단 후퇴했다가 총 반격전으로 전선을 차차 북상시키고 있을 무렵 공산군은 2개 사단규모의 병력을 후방에 투입, 산악「게릴라」 활동을 벌여 아군은 물론 양민들에게까지 많은 피해를 주었다.
적의 「게릴라」활동은 공산군 제10사단이 주력부대였고 이미 퇴로를 차단 당한 패잔병들을 규합하고 있어 처음의 세력은 대단했었다.
적 제10사단은 51년1월 중순쯤 태백산맥을 타고 후방 깊숙이 침투, 정선 영주 청송 영덕 안동 등 넓은 지역에서 출몰했고 한때는 팔공산에까지 들어와 다시 대구를 위협하기도 했다.
적의 「게릴라」활동은 처음에는 원주남방으로 침투, 아군을 후방에서 교란시켜 협공작전을 펴려는 의도 같았으나 전선이 북상함에 따라 적은 후방과의 연락이 끊겨 고립, 완전한 「게릴라」가 되어 버렸다.
이들은 처음에는 강릉지역으로부터 약간의 보급을 받고 있었지만 주로 촌락을 습격하여 현지약탈로 보급을 충당했고 심지어는 방야 무인하게도 백주에 파출소나 다른 행정기관을 습격하는 등 준동이 심했다. 「유엔」군사령관이 「유엔」안보리 사회에 보낸 한국전 보고서 14호(51년1월16일∼1월31일)는 이 당시의 「게릴라」활동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안동·영덕 등서 산악 타고 준동>
『적은 영월-안동-의성 추축에의 재 침입에 있어서 약1개 사단을 단양동부의 산악지대에, 다른 1개 사단을 안동과 영주간의 도로상에 남겨두고 잔여는 일찌기 침투하려던 지점으로부터 철수했다. 이 2개 사단은 의성 동방에서 준동중인 5천여의 「게릴라」부대를 실질적으로 증원했다. 적2개 부대와 「게릴라」군은 이기간 중에는 비교적 활발히 활동했으나 「유엔」군과 조우할 때마다 연락이 끊기고 추산했다. 의성 남방 및 동방의 「게릴라」부대는 동해방면의 영덕지구까지 활동이 미친 일이 있으며 몇 개 부대는 포항서 북방 약20「마일」의 보현산 지구로 남진했다.』
적은 1월 하순에 팔공산에서 한국군 2사단과 8사단의 반격을 받아 쫓겨나 북으로 도망하는 길에 안동·영덕에서는 한미 해병대, 정선지역에서는 9사단의 소탕작전에 걸려 거의 전멸했다.
이때의 공산군 제10사단 토벌작전에 참가했던 해병대와 2사단 관계자들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주=이 일대가 산악과 고지인 만큼 이 소탕전도 「피 어린 산과 언덕」에 포함시켜 2회에 걸쳐 다루겠다.)
▲공정식씨(당시 해병 1연대 1대대장=소령·예비역 해병중장·전 국회의원·48)

<해병대는 인천 상륙 작전을 끝내고 진해에서 충분히 재경비한 다음이어서 51년4월29일 공산군 토벌작전에 참가하기 위해 영덕에 집결했을 때는 사기는 높았고 장비나 보급도 거의 완벽했읍니다.
해병 1연대가 영덕에 집결했을 때 한국군 1군단은 영덕북방 동해안에서, 미 해병11포병연대는 포항∼영덕간에서, 미 해병7연대는 영덕 서남방에서 작전 중이었고 우리의 임무는 영덕∼안동간의 도로를 확보하면서 이 일대에서 출몰하는 적 패잔병을 소탕하는 일이었읍니다.
내가 지휘하는 1대대는 청송과 영덕의 중간지역인 원전동으로 나가고 3대대(김용국 소령부대)는 청송에, 2대대(강봉생 소령부대)는 예비대로 영덕에 머무르면서 수색을 맡게 되었읍니다. 이때 적은 미 해병1연대가 맡고있는 안동 동남방 길안천 계곡을 중심으로 박자동에 출몰하여 삼거리 지서를 습격하여 불을 지르고 도망가는 등 대담한 유격활동을 자행하고 있었어요. 따라서 연대본부에서는 3대대의 일부 병력을 이 지역에 파견시켜 적의 준동을 막도록 하는 한편 청송의 3대대를 이곳으로 옮기고 원전동의 우리 1대대는 청송으로 이동했읍니다.

<보급은 민가약탈로 충당하고>
이사이에 2대대 1개소대가 덕산동에서 적의 기습을 받아 막대한 피해를 냈고, 영덕 서남방 항동에 본거지를 둔 적 2천여명이 북상을 기도하고 있다는 정보에 따라 1대대는 적의 북상 「루트」를 막기 위해 신양동으로 다시 이동했읍니다. 이때 귀순한 적병의 진술에 따르면 항동의 적은 북상을 단념하고 동남방 동대산에 집결했다는 것이었어요.
이 진술에 따라 우리 1대대는 동대산공격에 나섰어요. 1대대는 낮12시쯤 공격을 시작하여 이날 저녁5시쯤 제1공격 목표인 팔각산을 점령하고 다음날 아침 동대산 공격에 나서서 하오4시쯤에 완전 점령했읍니다. 적은 항동으로부터 동대산을 지나 남쪽 향로봉으로 쫓겨갔어요.
무릎까지 빠지도록 눈이 많이 왔는데 동대산을 공격하면서 우리는 적의 이동야전병원을 습격했읍니다. 군의관, 부상병 등 많은 포로를 잡았는데 이중에는 여자간호원이 2명이나 있었어요. 내가 전쟁을 치르는 동안 여자간호원은 이곳에서 처음 보았읍니다.
이때의 적은 계속 패주하는 중이어서 지휘계통마저 제대로 서있지 않고 보급은 일체 되지 않았기 때문에 민가를 약탈하여 민간인들의 피해가 컸읍니다.
더욱이 적은 우리와 접전을 피하고 기습작전을 폈다가는 곧장 도망가는 등으로 이동이 어찌나 심한지 우리가 적의 소재를 파악하고 추격하기란 무척 힘들었어요.
그러니까 적이 도망했을 때는 대강 적이 어디쯤에 가 있을 것이라고 추측하여 포격했고 때에 따라서는 동해안의 함포 사격을 지원 받기도 했어요. 야포보다는 함포의 위력이 대단했던 것 같았읍니다. 적 포로들의 진술을 들어보면 난데없이 맹렬한 폭음과 함께 날아오는 포격에는 벌벌 떨었다니까요.
적 10사단은 산악지대의 「게릴라」전을 위해 훈련받은 부대인 것만은 틀림없어요. 포로를 잡고 보면 모두들 비상식인 미숫가루를 자루에 넣어 허리에 차고 있었어요.>
▲함병선씨(당시 2사단장·준장=예비역 중장·현 사업·52) <51년2월 2사단은 가평 전투를 끝내고 안동군청에 사단사령부를 설치한 다음 부대 재편성을 막 끝내고있는 참이었는데 육본으로부터 일월산을 중심으로 모여있는 공산군 제10사단을 소탕하라는 명령을 받았어요.
2월 초순께라고 생각되는데 이때는 이미 적 10사단은 영주동쪽 일월산에 본거지를 두고 산맥을 타고 내려가 의성에서 대구를 위협하고 있었어요.

<팔공산서 대구까지 한때 위협>
대구 팔공산에도 적 일부가 출몰하고 있었다니까요. 따라서 이때의 2사단사령부는 동·남·북으로 적에게 둘러싸인 형세에 있었어요.
적 10사단은 태백산맥을 타고 내려와 후퇴하지 못한 잔당들과 규합하여 재편성 된 것으로 생각되고, 이미 퇴로가 차단되어 있었기 때문에 최후의 발악이 대단했어요.
소탕명령을 받고 나는 17연대를 사단본부에 배치, 청송·영덕지방까지 안동에서부터 동부지역을 맡도록 하고 31연대는 영주북쪽으로 영주성, 일월산까지, 32연대는 남쪽으로 의성지역을 맡아 소탕하도록 배치했읍니다.
적은 일월산에 본거지를 두고 있었으나 주력부대는 의성지역에 몰려 대구를 위협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조재미 대령이 인솔하는 32연대가 처음으로 의성에서 적과 교전, 적 10사단의 대대규모의 병력을 완전히 섬멸했읍니다. 사실상 적은 이 전투에서 전의를 상실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후의 전투는 마치 토끼사냥 하듯 우리는 적을 일방적으로 추격하는 것이고 적은 쫓기기에 바빴으니까요.
의성에서 노획무기가 「트럭」으로 5대 가량 되었으니 적은 이때 이미 전투력마저 상실했다고 생각됩니다. 조 대령은 이때의 전과를 태백산 지구 전투경찰대의 공로로 돌리더군요. 전투 중에 있을 수 있는 아름다운 이야기이지요.
의성에서 적은 완전히 녹아 청송·영덕 등지로 달아나기 시작했고 주력부대는 산맥을 타고 일월산에 다시 집결했읍니다. 이때 31연대는 일월산을 완전히 포위하여 적을 독 안에 든 쥐처럼 만들고 추격작전을 폈읍니다.
정확한 날짜를 기억할 수는 없는데 나는 연대장 박노규 대령과 함께 산밑 양지바른 언덕에서 점심을 먹으면서 영덕 쪽으로 적의 퇴로를 열어놓고 이곳으로 달아나게 하여 적 사단장을 사로잡아보자는 이야기를 나눈 다음 사단사령부로 돌아왔읍니다. 사령부에 돌아오자마자 연대장 박 대령이 전사했다는 비보가 왔어요. 어처구니 없더군요. 급히 달려 가보니 적에게 저격을 당했어요.
항상 전투에 나서서 독전해온 박 대령은 이날도 사단장을 사로잡아 보겠다는 생각에 나와 헤어지자마자 앞서 나서서 공격을 지휘하다가 매복한 적병들에게 노출되었던 것 같아요. 눈에 불이 납디다.

<봉화로 적을 기만 소탕에 개가>
17연대와 32연대를 모두 이곳에 집중시켜 적을 몰아댔읍니다. 이때부터 적은 사방으로 흩어져 이곳 저곳에서 출몰하기 시작했읍니다.
영덕에서는 17연대와 전투경찰대가 함께 소탕작전을 펴고 있었는데 전경대가 우리 17연대를 적으로 오인하여 공격한 일도 있었어요.
이때의 소탕작전은 적이 야간에만 움직이기 때문에 우리도 야간매복작전을 주로 했으며 특히 봉화작전을 많이 썼읍니다. 봉화를 올리면 적에게 노출되어 역습을 받을 염려가 있지만 적은 우리를 공격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도망하기에 바쁘니 봉화가 오르면 적은 퇴주로를 바꾸기 위해 갈팡질팡하게 되고 따라서 아군은 공격하기가 쉬웠읍니다.
봉화로 적을 기만한 셈이죠.
대부분의 적은 일월산에서 소탕되고 일부 병력이 산맥을 타고 북으로 도망하다가 강원도 정선지역에서 9사단에 완전히 녹았읍니다.
결국 적 10사단은 팔공산까지 침투했다가 2∼3월 사이에 거의 전멸했다고 생각됩니다.>
◆주요일지(1952년7월29∼31일)
※29일 ▲7명의 국회의원에 대한 기소중지 ▲휴전회담, 참모장교회의 계속
※30일 ▲66대의 B-29, 야간공습 ▲이 대통령, 외국기자에 휴전협상 시한 정하라고 요구 ▲북한출신 민간인 억류자 5백명 제3차로 석방 ▲일본최고재판소, 한국인 및 대만인 전범 30명의 석방청구를 각하.
※31일 ▲「밴플리트」사령관, 격전지인 불모고지시찰 ▲자유중국 입법원, 중일평화조약비준 ▲「맥아더」원수, 대통령선거에 불관여 언명
◆알림=멀지 않아 6·25때의 「병참문제」를 다룰 계획이오니, 당시 한·미 노무사단(KSC)에 관계한 분은 중앙일보편집국 「민족의 증언」담당자 앞으로 연락해 주시면 감사하겠읍니다.
전화는(28)8211(교환)와 74번, 야간이나 일요일은 (94)3415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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