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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패버 “김 장군, 카리스마 있고 유머감각 뛰어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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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2호 03면

마이클 스패버(왼쪽 사진 앞줄 왼쪽)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김정은. 이들의 만남은 데니스 로드맨(오른쪽 사진 오른쪽) 방북 당시 이뤄졌다. 로드맨 왼쪽은 조셉 터윌리거. [사진 매클린, 터윌리거 홈페이지]

데니스 로드맨의 두 차례 방북 사진을 뜯어보면 두 명의 ‘통역’이 보인다. 캐나다인 마이클 스패버와 미국인 조셉 터윌리거다. 북한의 최고지도자 김정은(29)에게 귓속말을 할 수 있는 서양인이자 김정은이 아끼는 친구들이다. 캐나다 시사주간지 매클린은 “로드맨의 말을 김정은에게 통역한 건 스패버이며 터윌리거는 김정은의 말을 로드맨에게 통역했다”고 전했다.

외국인 친구 사귀는 김정은의 심리 해부

“남측 기자에겐 아무런 얘기도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인터뷰는 거절당했으나 기자의 지인인 르피가로 서울특파원, 미국의소리(VOA) 아시아 순회특파원들과 스패버가 페이스북 친구인 터라 간접 관찰을 할 순 있었다. 그 결과 스패버는 ▶정치엔 관심이 없으며 ▶북한을 순수한 마음으로 좋아하며 ▶북한 정권에 대해 극도로 말을 아낀다는 점이 드러났다. 4일부터 10여 차례 오간 e메일에서 스패버와 터윌리거는 김정은과 북한 체제에 높은 충성도를 보였다. 이 기사가 스패버와 터윌리거의 북한 프로젝트를 중지시키게 된다면 평양 지도부를 보호하기 위해 노력한 두 사람으로선 상당히 억울할 터다. 매클린 인터뷰에서도 스패버는 “정치나 인권 문제는 정부들끼리 협의할 문제”라며 극도로 말을 아꼈다. 터윌리거가 보낸 e메일 끝엔 ‘중요한 내용’이라며 ‘DPRK(북한)용 e메일 주소’를 따로 적어놓고 ‘여기엔 정치적으로 민감할 수 있는 언급은 절대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지난 9월 북한의 고려항공 여객기 앞에서 포즈를 취한 데니스 로드맨(왼쪽 셋째). 왼쪽부터 마이클 스패버, 조셉 터윌리거. [머메이즈 테일 블로그]

페이스북엔 북한 음식·영화 관련 글과 사진
스패버가 본인의 페이스북에 링크를 걸어놓은 블로그엔 한국 입장에서 보면 친북 성향의 글·이미지가 상당수 있다. 지난해 대선 즈음 (스패버가 아닌 제3자가) 올린 것 중엔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영화 ‘킬 빌(Kill Bill)’을 패러디해 이정희 통합진보당 대표의 얼굴을 박은 ‘킬 박(Kill Park·박근혜 당시 대선 후보를 지칭)’ 포스터도 있다. 스패버 본인은 그러나 정치적 언급을 자제한다. 그의 페이스북엔 한국 혹은 북한 식당으로 보이는 장소에서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사진이 있다. 가장 최근인 지난 2월 19일 올린 글엔 자신이 먹은 북한 음식 사진을 올려놓고 “이게 뭔지 맞혀봐. 힌트: 맵고, 채식주의자들도 먹을 수 있고 굉장히 값이 쌈”이라는 글을 올렸다. 여기엔 38개의 댓글이 영어·한국어로 달렸다. 지난해 5월 올린 글엔 북한의 영어 만화책을 소개해놓았고, 좋아하는 페이지로 북한 군복을 입은 여성이 경례를 하고 있는 사진이 올라 있는 북한 영화 팬페이지를 설정했다.

터윌리거의 구글 계정엔 그가 로드맨 방북길에서 로드맨 옆에 서서 ‘조선’이라는 한글 글자가 크게 박힌 푸른색 티셔츠 차림으로 환히 웃고 있는 사진이 있다. 컬럼비아대 유전학과 교수치고는 점잖은 표현으로 ‘독특한’ 인물이다. 중국에 자주 드나드는 한 북한 전문가는 익명을 전제로 “김정은이 로드맨 방북 당시 ‘내 아랫사람들은 엄청 보수적이고 답답하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며 “그런 답답함 속에서 해방구로 로드맨이나 스패버를 찾는 듯하다”고 분석했다.

김정은이 외국인 친구에게 끌리는 심리학적 원인은 뭘까. 익명을 요청한 한 심리상담 전문가는 김정은의 어린 시절에서 답을 찾았다. ▶해외에서 유년기를 보내 외국인들과 친근하며 ▶북한 같은 폐쇄 사회에서 최고지도자로 떠받들어지기에 뭔가 특이한 것을 찾는다는 분석이다. 그는 “김정은의 무의식 속엔 (해외에서 보낸)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가 짙게 있을 것이다. 그의 인지도식(cognitive scheme·개인이 어떤 현상을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기본 틀) 속엔 외국인에 대한 이런 향수가 자리 잡고 있을 것이고, 이것이 대인관계 형성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설명했다.

“김정은 무의식 속엔 친(親)외국인 취향”
다른 분석도 있다. 무의식 때문이 아니라 김정은이 명확한 목적의식을 갖고 선전효과를 노려 로드맨·스패버에게 전략적으로 접근했다는 분석이다. 김정은이 로드맨을 부른 건 항간에 알려진 대로 농구에 대한 애정이 아니라 로드맨이 기인(奇人)이기 때문이라는 얘기다. “만약 미국 외교관을 불렀다면 하루 정도만 보도됐겠지만 로드맨을 부르면 ‘왜 하필 로드맨이냐’는 질문부터 로드맨의 일거수일투족이 계속 생중계된다. 김정은은 이런 효과를 노린 것이다. 매우 영리한 전략이다.” 김영수 서강대 정치외교학과장의 분석이다.

김영수 학과장은 이어 로드맨·터윌리거 같은 외국인에 대한 북한의 시선을 “북한이 미국인에 대해 전형적으로 보여온 이분법적 사고”라고 정의했다. 북한은 ‘조지 W 부시는 나쁜 미국인, (김일성 주석과 김영삼 대통령 정상회담을 주선했던) 지미 카터는 착한 미국인’이라는 식으로 이분법적 정의를 하며, 이 맥락에서 로드맨과 터윌리거·스패버는 ‘착한 서양인’이라는 설명이다. 김 학과장은 이어 “혹시 로드맨이 괴상망측한 행동을 해도 ‘쟤는 원래 이상한 애’라고 하면 될 일이고, 북한 내·외부엔 ‘김정은은 기인도 품을 줄 아는 호방하고 통 큰 지도자’라는 식으로 선전도 된다”고 말했다.

정영철 서강대 공공정책대학원 북한·통일정책학과장은 다른 시각을 내놨다. “김정은이 특이한 사람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북한에 호의를 보이는 외국인에게 북한이 관심을 갖는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분명한 건 김정은과 로드맨 모두 상황을 즐기고 있다는 점이다. 김 학과장은 “로드맨 역시 영리하게 행동한다. 혹시라도 말썽을 부리면 자기만 손해라는 걸 잘 알고 있고, 김정은 딸 이야기라든지, 북한 사진을 조금씩 공개하면서 상황을 잘 이용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로드맨은 세 번째 방북부터는 기존 방송사 다큐멘터리 팀이나 기자들과는 함께 움직이지 않는 대신 ‘패디 파워’라는 온라인 도박회사와 파트너십을 맺었다. 독자적으로 행동할 자유를 확보하고 혹시라도 김정은의 마음에 들지 않는 장면이 발생하지 않도록 대비하려는 포석으로 읽힌다. 김정은과 로드맨의 관계는 ‘윈-윈’이며 그 핵심 축이 스패버·터윌리거 듀오인 것이다.

북미 하키팀 방북 성사 땐 ‘하키 외교’
스패버는 2005년 평양에서 반 년간 거주하며 인맥을 쌓고 북한 말을 완벽하게 익혔다. 매클린에 따르면 캐나다 밴쿠버에 본부를 둔 비정부기구(NGO)가 평양에서 운영하는 학교에서 교사로 일했다고 한다. 중국 옌지에서 한때 북한 말을 가르치는 학교를 운영하기도 했다고 매클린은 전했다. 스패버는 매클린에 “김 장군(김정은 지칭)은 세계 언론에 진지한 모습으로 나오지만 우린 그의 카리스마 있고 친근한 모습을 봤다. 유머 감각도 뛰어나다”고 말했다. 그의 아이폰엔 김정은과 만날 당시 북한 당국이 그 장면을 찍어준 사진이 들어 있다.

스패버는 어떤 사람일까. 그와 친분이 있는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교수는 매클린과의 인터뷰에서 “마이클(스패버의 이름)은 굉장히 상식적이고 평범한 사람이지만 동시에 상당히 스마트하다. (북한) 사회를 잘 이해하며 평범하지 않은 것을 체험할 용기도 있다”고 전했다. 란코프 교수를 접촉했으나 그의 휴대전화 전원이 꺼져 있어 연락이 닿지 않았다.

익명을 요청한 다른 외국인 소식통은 중앙SUNDAY에 “스패버는 호감 가는(likeable) 인간형이며 애정 있고 유머감각이 뛰어나며 똑똑하다”고 평가했다. 이 소식통은 또 스패버가 “북한 체제를 평가하는 식의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며 “대신 북한 사람들에 대해 ‘정이 많은 사람들’이라며 좋아한다”고 전했다. 터윌리거 역시 비슷한 평가를 받는다. 스패버보다 조금 더 농담을 좋아하고 교수인 터라 말도 잘하지만 김정은과 북한 정치에 대해선 일절 코멘트를 하지 않는다.

얼굴마담은 로드맨이지만 핵심 축은 스패버다. 매클린은 스패버가 고국 캐나다가 강한 하키를 활용할 것이라고 했다고 보도했다. 북미아이스하키리그(NHL) 소속 선수들의 방북을 추진할 계획을 갖고 있다고 한다. 로드맨을 앞세운 농구 외교에 이어 ‘하키 외교’가 등장하는 셈이다. 그리고 그 막후 주인공은 김정은과 스패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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