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의 물 한 방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벌써 오래된 이야기지만 필자가 미국의 유학과 연구생활을 일단락 짓고 귀국하려고 마음먹던 때의 일이다. 그때만 해도 경기가 호전되어 미국체재에 유리한 분위기가 이루어질 때라 미국인 친구들은 왜 이 좋은 나라에서 영주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나의 이때 심경은 고학에 오래 시달렸던 뒤라 망향의 심사도 합세하여 귀국의 결정을 내린 것이었으나 그냥 빙긋이 웃는 것으로 응답하였다. 그랬더니 그중 한사람이 『태평양의 물 한 방울이 되기 싫어 그렇지』하는 것이 아닌가. 미국에 오래 있어야 태평양의 물 한 방울처럼 미미하게 지낼 터이니까 본국에 돌아가 활약하여 보고 싶은 것이지 하는 뜻이다. 한편으로는 계구우후라는 고어가 머리에 떠올라 고소를 금치 못하였다.
잘 알다시피 미국에서 자리가 잡히면 천편일률인 일상생활에서 마치 기계의 일부분 같은 존재로 지내는 것 같다. 모든 제도와 운영이 틀이 잡혀 모험이나 투기가 통하지 않으며 대부분의 인사들이 평범한 듯한 생활의 연속으로 만족한다.
따라서 그러한 환경에서는 공연한 비약이라든가 급작스러운 출세라든가 하는 개인 등용은 여간하여 보기 드물다. 자신이 맡은 바 의무와 직책을 착실하게 수행하고 이에 상응하는 보답을 받아 흡족한 마음으로 지내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 자신이 태평양의 물 한 방울 격이라는 생각에 젖어 조금도 섭섭한 것이 없다.
나 자신도 한국에 돌아와 일약 출세를 한다든가 감투를 쓰겠다든가 하는 염의는 일절 없이 미국에서 들은 말대로 물 한 방울로 자처하여 평범한 직책을 고수하고 지내는 터이다. 그러나 주위를 보면 공에 급급하고 두각을 나타내는데 너무 초조한 인사들이 많은 것 같다. 불만과 실의의 교착이 이렇게 하여 충만 되는 것이 아닐까.
물 한 방울이 수없이 모여서 물 한 사발이 되고 사발 물이 또 무수히 합쳐져 큰 바다를 이루는 집합의 힘을 생각할 때 평범한 한 방울의 기여가 결코 미미한 존재로 끝나서는 안될 것이다.
「태평양의 물 한 방울」, 이것이 자기의 위치를 인식하는데 얼마나 적절한 말인가 <이춘영 서울대농대교수·이박>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