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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적 대표들 서울 97시간의 결산|드러난 북의 본질…성급한 기대에 찬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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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27년만의 나들이 96시간-. 남녁의 바람을 쐰 북적 대표들의 숨가쁜 서울 4박5일은 끝났다. 가족 찾기 남북 적십자 회담 제2차 서울 본 회담에 참석한 북적 대표단 일행 54명이 일정을 모두 마치고 16일 상오 판문점을 거쳐 북으로 돌아갔다.
2주 간격으로 이뤄진 남북 왕래의 서막은 닫혔다. 기대와 좌절과 훤소와 감격이 엇갈리는 속에 막이 내린 허전함 뒤에 남은 것은 무엇인가.
『임진강 나루터의 뱃사공으로부터 서귀포 갯가의 미역 따는 해녀에 이르기까지-』로 시작되는 김옥길 이산 가족 대표의 조선 「호텔」 연설로부터 김태희 북적 단장이 남산 팔각정에서 말한 대로 『금강산에서 계룡산에 이르기까지』 5천만 겨레가 주시한 이번 적십자 내왕은 말의 성찬으로 가득했다. 2차 회담의 「지각 합의 문서」에도 드러났듯이 민주와 자유로운 「원칙」과 온 겨레의 「염원」과 남북 성명, 인도주의 및 적십자의 「정신」, 그리고 흩어진 가족의 고통을 덜어주자는 「동포애」가 누구든 입을 열면 튀어 나왔다.
그러면서도 27년 응어리진 문제의 핵심은 끝내 건드리지 못한 채 헤어졌다. 핵심을 찌르기는커녕 25차의 예비 회담 때부터 예상하긴 했지만 평양·서울 본 회담에서의 북의 정치 공세로 하여 온 겨레는 단절 끝에 만난 민족의 축전에서 또 다른 단절을 맛봐야했다. 그것은 실로 「27년의 두께」를 실감한 쓰린 경험이었다. 「남의 54명」이 입북했을 때 물론 저들은 많은 것을 보여주려 했다. 외신이 보도한대로 우리도 「북의 54명」에게 6·25후 우리의 발전상을 보여주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남의 눈에 비친 북에는 아파트 건축장을 「전투장」이라 써놓는 등 「유일」을 부르짖는 「플래카드」와 현수막의 숲 속에 「획일」과 「체제」와 「혁명 엄마」와 그 아이들의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북의 눈에 비친 우리의 모습은 어떻게 둔갑했을까. 충무공을 받든 현충사는 「반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으로 보았고 서울의 차량들은 모두 지방에서 끌어다 놓은 것으로, 그리고 고속도로는 군사도로로, 지하철은 방공호로, 수복 식당을 수복 식당으로 저들은 보았다. 승려의 장삼자락을 『여름에 웬 두루마기냐』라고 묻는가하면 고층 「아파트」를 보고 저속에도 물이 나오느냐고 묻기도 하고 「안테나」의 숲을 보고 『저 TV 「안테나」는 가짜로 세운 것 아니냐』고 묻는 저들이었다.
북의 정치 연설에 대한 빗발치는 항의 전화 가운데 『우리 대표단의 인내에 경의를 표한다』는 내용과 적십자 회담에서 「수령님」을 되 뇌야 하는 그들에게 연민의 동정을 보낸다는 전화는 강자가 아량을 보인다는 말과 함께 의미가 깊다.
14일 밤 이후락 조절 위원장 초대연때부터는 대표들의 입에서 「김일성 운운」하는 말이 나오지 않은 것은 북쪽의 지시가 있었다는 설도 있지만 서울 시민의 돌변한 무언의 항의에 영향을 입은 듯하다.
「쇼핑」은 그들 말대로 하면 『살 것이 없어서』-. 가두에서의 서민과의 접촉, 한국 기자와의 회견 기피 등 개운치 않은 몇 커트를 남긴 것은 어딘지 나사를 잡아당긴 냄새마저 풍긴다.
아무튼 양차 회담에서 우리가 얻은 것은 ①말만 들어왔던 북의 실상을 직접 체험했다는 점 ②북에 가서 「유일」과 「체제」속의 사회를 보았고 우리의 다양과 저력을 저들에게 보여줬다는 점 ③북의 정치 색에 대한 우리의 단호하고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는 점 ④남북왕래에 대한 엄청난 기대나 성급한 좌절은 금물이라는 교훈 ⑤3, 4차 본 회담 일정을 잡고 본 회담 의제에 대한 실질 토의로 들어가기로 합의했다는 점등이다.
「남의 54명」의 북행 길에서 보여줬던 북의 차가운 반응이 귀환길에선 약간 활기를 띠어 손을 흔드는 모습으로 바뀌었던 것과는 역설적으로 「북의 54명」이 남행길에서 봤던 열렬한 동포애의 환호가 그들의 귀환길에 식어진 반응으로 변했다는 것은 많은 암시를 던져주고 있다.
「유엔」에서의 한국 문제 처리를 겨냥한 계책 때문에 본 회담에서 북적이 서울 회담의 순항을 방해한 끝에 가까스로 회담장이 아닌 숙소에서 사전 예고도 없는 전격 약식 서명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련을 겪었다.
8월에 시작한 1차 평양 회담에 이어 9월에 2차 서울, 10월에 3차 평양, 11월에 4차 서울로 본 회담이 월례 회담의 관례를 세운 것도 주목할만하다. 혈육의 정을 이으려는 민족사적 노력이 양차 회담의 경험을 통해 자칫 빗나가면 차디찬 반목으로 변하고 이산 가족의 저주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으며 민족의 슬기를 보여주려다 세계에 민족의 수치를 드러낼 가능성도 있다는 교훈을 얻기도 했다. 상대방에 대한 탐색과 예우로 끝난 첫 남북 왕래 뒤에 남은 허전함은 접촉 초기의 경직으로 돌리고 다음 왕래부턴 외형보다 내실, 말의 성찬보다 실질의 전진을 기약해 볼만하다. <최규장 기자>

<북적 대표단 체경 일지>
◇12일
▲상오 10시 북적 대표단·자문위원·수행원·보도진 등 54명 김태희 단장을 선두로 판문점 도착.
▲10시15분 북적 대표단, 「자유의 집」 2층 휴게실서 휴식.
▲10시55분 「자유의 집」 출발.
▲낮 12시15분 북적 일행, 통일로∼독립문∼중앙청 앞∼시청 앞∼소공동∼퇴계로 거쳐 숙소인 「타워·호텔」에 도착.
▲하오 4시30분 북적 대표단, 한적 김용우 총재 예방.
▲7시 김용우 한적 총재가 베푼 경복궁 경회루 「리셉션」 참석.
▲9시 이범석 수석 대표가 「타워·호텔」에서 베푼 비공식 만찬회 참석.
▲10시40분 한적 정주년 대변인과 북적 한시혁 대표, 「타워·호텔」서 14일 상오 5시까지 철야 실무 회담, 타결을 못 봄.
◇13일
▲상오 10시20분 제2차 남북적 본 회담
▲낮 12시25분 제2차 본 회담 합의 사항 없이 폐막, 실무 접촉 계속.
▲낮 1시30분 양탁식 서울시장이 「도오뀨·호텔」에서 베푼 오찬회 참석.
▲하오 3시30분 창덕궁·비원 관람.
▲4시30분∼6시55분 북악 스카이웨이 거쳐 경복궁 국립박물관 관람.
▲8시10분 이범석 수석 대표가 베푼 워커힐 만찬회 참석
▲밤 12시 숙소 도착.
△14일
▲상오 10시10분 현충사 참배 위해 서울 출발.
▲낮 12시10분 현충사 도착, 이은상씨 안내로 1시간10분 동안 참배
▲하오 3시15분 「타워·호텔」 도착, 점심.
▲6시45분 「타워·호텔」 1층 「렉스·룸」에서 남북적 합의 문서 교환.
▲7시 이후락 조절 위원장 주최 영빈관 리셉션 및 만찬회
▲10시 한국 기자 협회 주체로 오진암에서 북한 기자단을 위한 파티.
▲10시5분 한적 안내로 북적 수행원 20명, 서울 시내 밤거리 관광.
◇15일
▲상오 10시30분 시내 관광 (남산 팔각정∼시청 앞 지하철 공사장 등) .
▲낮 12시 한적 김준엽 자문위원이 베푼 KAL 「호텔」 오찬회 참석.
▲하오 3시10분 서울 시내 차 중 관광 (KAL 호텔∼서울역∼남산 관광도로∼한남동∼강변 4로∼한강 「맨션·아파트」앞∼강변 3로∼서울대교∼5·16광장∼강변 1로∼동작동 앞∼강변 6로∼제3 한강교∼「타워·호텔」.
▲4시30분 숙소에서 「성장하는 한국의 공업」 영화 감상.
▲7시 세종 호텔 해금강 홀에서 백두진 국회 의장 주최 만찬회 참석.
△16일
▲상오 8시24분 북적 김태희 단장과 윤기복 자문위원, 이후락 조절 위원장 방문 작별 인사.
▲상오 9시33분 북적 대표단 일행 4박5일의 서울 체류 마치고 판문점으로.
▲상오 11시5분 판문점 중립국 감독위실 통해 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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